‘모범택시’에서 ‘이 구역의 미친 X’, ’로스쿨’까지
데이트폭력도 모자라 연인의 모습을 불법으로 촬영하여 악의적으로 이용하는 행위 자체가 악질 중의 악질인 범죄로 간주되어야 하는 까닭은 그것이 피해자의 삶을 완전히 짓밟아 놓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여러 드라마 혹은 영화에서 소재로 다루어질 만큼 해당 범죄가 일으키는 문제적 상황은 심각하지만 여전히 그 해결방법은 묘연하다는 게, 결국 알아서 조심해야 하는 수밖에 없다는 게 참혹할 따름이다.
“그 동영상들 하나하나가 전부 사람 목숨이야.”
SBS ‘모범택시’에는 불법으로 촬영된 동영상들을 저장하고 유포하는 곳이 등장한다. 이들이 얼마나 끔찍하냐면 동영상의 원본을 따로 저장해두고 혹여 삭제라도 될라치면 또 다시 게시하여 피해자들을 끝나지 않을 고통의 구렁텅이로 던져넣는다. 지옥보다 극심한 절망에 처한 이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선택을 하는데 작품 속 인물 안고은(표예전)의 언니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더욱 원통한 바는 이 ‘정의가 실종된 사회’에서 고은이 억울하게 죽은 언니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조차 많지 않았다는 것이다. 동영상은 지워도 지워도 다시 되살아나고, 고인(故人)의 명예는 실추될 대로 실추되어버린 상황에서 그녀에게 가능한 수는, 사적으로 복수를 해주는 곳의 힘을 빌려 법이 작용하는 영역 밖에서 언니를 죽게 한 이들로 하여금 아주 제대로 죄의 값을 치르게 하는 것 뿐이었다.
그래서 더욱, 사투 끝에 수많은 불법 동영상들이 저장된 ‘광산’이란 곳이 악인과 함께 불타오르는 장면은 법이 내리는 판결보다 통쾌한 무엇이었다. 하지만 이는 허구의 이야기에서나 가능한 지극히 판타지스러운 결말로, 보통의 경우 카카오TV 웹드라마 ‘이 구역의 미친 X’의 이민경(오연서)이 맞닥뜨렸던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으니 그 비극적인 분노를 풀 길 없어 마음의 병에 걸리지 않을 재간이 없다.
“저는 그 사람이 죽었으면 좋겠어요,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럽게 죽었으면 좋겠어요.”
몸과 마음 안팎으로 영민함을 갖추고 제 힘으로 일구어낸 좋은 직장에 다니던 민경의 삶은 열등감으로 범벅이 되어 있는 한 남자에 의해 완전히 망가졌다. 이혼한 줄 알고 연인관계를 맺었던 그가 이혼은커녕 여전히 부인 곁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민경이 헤어지자고 하자, 그 남자가 보인 반응이란 것이 민경을 불법으로 촬영한 동영상을 가지고 한 협박과 폭력이었으니까.
이 끔찍한 경험으로 민경이 그동안 정성을 다해 쌓아온 자존감은 더 이상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을 만큼 상처를 입고 무너져 내렸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쫓기듯 이사까지 가야 했던 건 오히려 별 문제가 아니었다. 스스로에 대한 인식이 바닥으로 떨어져 버린 그녀는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말을 걸까 미쳤다는 소리를 감수하면서까지 머리에 꽃을 꽂고 다닐 정도로 매순간 심리적으로 극심한 불안감을 느끼는 상태가 되었다. 그토록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당당했던 그녀의 삶이 한 순간에 뒤바뀌어 버린 것이다.
“제가 신고를 안 한 건 내 입으로 말하기가 죽기보다 싫었을 뿐입니다.”
이쯤 되면 혹자는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아니 도대체 왜, 그 영민한 여자가 자신의 삶을 짓이기고 있는 남자에게 아무런 대응도, 조치도 취하지 못했냐고. 슬프게도 이게 현재 우리가 처해 있는 보통의 현실이다. 이를 제대로 보여줄 뿐만 아니라 강력한 반박을 가하는 게 JTBC ‘로스쿨’이다. 극 중 인물 전예슬은 남자친구가 자신과의 관계를 몰래 촬영한 동영상을 유포하려 하자 이를 막으려다 중상해를 입혀 피고인으로서 재판에 서게 된다.
그러나 재판의 과정에서 밝혀진 것은 그녀가 연인에게 상습적으로 데이트폭력을 당한 피해자였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왜 신고를 하지 않았을까. 이에 그녀의 변호를 맡은 양종훈(김명민)은, 신고를 한다는 행위 자체가 피해자로선 죽기보다 싫은 일을 간신히 용기내어 하는 것인데, 돌아오는 말이란 게 고작 ‘진짜 당한 게 맞아?’라는 모욕적인 질문에 불과한 경우가 대다수라는 것. “사실 전모양처럼 데이트폭력 피해자들은 신고를 잘 안 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재판 내내 고개를 들지 못했던 예슬이 스스로를 ‘전모양'이라 부르며 객관화할 기회가 주어지자 당해 왔던 물리적, 심적 피해를 담담하고 거침없이 진술하는 모습이 유독 인상 깊은 이유이기도 하다. 피해자가 피해자로서 당당히 모습을 드러낼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 그래야 제대로 처벌할 길이 열리니 이는 우리가 악질적인 범죄를 다루는 데 있어 가장 먼저 갖추어야 할, 가장 강력한 방법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