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음주 첫가출
참 어리석지만,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똑같은 짓을 할 것 같은 일들이 있다.
첫 음주
열여섯, 고등학교 1학년 가을이었다. 나는 웅크리고 누워있는 날이 많았다. 만화책을 쌓아놓고 읽었다. 우리집은 산꼭대기에 있는 W초등학교 아래에서 문방구와 만화가게를 했다. 두 가게는 붙어있었고 가게 뒤에 방이 있었다. 문방구 앞에는 각종 뽑기 놀이와 실내화와 학년별 전과책이 놓여있었고 주렁주렁 돼지저금통이 천막 아래 걸려 있었다. 만화가게에서는 국물떡볶이가 끓고 있었고, 문방구에서는 아이들이 바글바글 했다. 등하교 시간 학생들이 몰릴 때 나는 가을논에 세워진 허수아비처럼 아이들을 지켜보곤 했다. 추석이 되기 전에 통영 이모부가 왔다. 이모부는 젊었을 때 결혼에 반대하는 장인어른 앞에서 유리컵을 이빨로 물어 깨고 유리를 씹었다는 무서운 사람이지만, 키가 미루나무처럼 크고 목소리가 굵직하고 용돈을 듬뿍 주는 호탕한 사람이기도 했다. 엄마가 이모부를 위해 됫병짜리 정종을 사서 접대했다. 당시 우리 집에는 아무도 술을 먹지 않았다. 이모부가 돌아가고, 절반쯤 남은 정종병은 냉장고에 들어갔다. 엄마가 가게로 나가자 나는 냉장고를 열어 컵에 정종을 따랐다. 반정도 따라서 마셨다. 꿀꺽꿀꺽 입에서 목구멍으로, 배속을 훑고 내려가는 싸한 음료를 느꼈다. 쓰기도 하고 달기도 한, 차갑고도 뜨거운 느낌, 마치 불을 가둔 얼음을 삼키는 것 같았다. 얼음은 녹고 불길이 혈관에 스며들었다. 나는 노곤해졌다. 그리고 한참을 잤다. 고단하고 죄많은 열여섯의 나를 위로해주는 술이었다.
첫 가출 또는 출가
그해 4월에 나는 검도를 배웠었다. 중학교 동창이면서 같은 고등학교에 들어간 G와 함께. G나 나나 그럴 형편이 못 되었는데, G가 어떻게 학원비(도복과 죽도 등 일체 비용)를 마련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등록금을 삥땅 쳤다. 학교에 내야 할 등록금을 학원에 냈다. 검도학원에서, 첫날부터 검도복을 입고 연습했는데, 하낫둘 하낫둘, 두 손으로 꼭 잡은 죽도를 머리 뒤로 획 넘겼다가 앞으로 획, 절도 있게 내려 때린다. 그에 맞춰 두 다리도 절도 있게 앞으로 뒤로 움직인다. 단순하고 반복된 동작이다. 하지만 그렇게 평안할 수가. 그때 나는 마음이 편안했다. 강해지는 느낌 때문일까? 아니면 언젠가 들킬 거라는 불안한 긴장 때문에 생긴 일시적 안정감이었을까? 어쩌면 쿵후영화의 주인공이 복수를 위해 스스로를 단련하는 느낌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비록 3개월 남짓이었지만 나는 행복했다. 결국 내 것이 되지 못할 행복. 등록금을 안 낸 것이 드러나는 것은 시간문제. 이 범죄행각이 드러나면서 나는 엄마아빠의 권력을 위임받은 열두 살 위의 오빠에게 두들겨 맞고 갈비뼈가 부러진다. 가게 뒷방에서, 오빠의 주먹이 내 뺨과 복부와 가슴을 향할 때 나는 어린 손님을 대하는 다정한 엄마 아빠의 음성을 들었다. 나는 심장이 차가워졌고, 잘못했다는 말 한마디 않고 이를 악물고 맞았다. 그래서 더 매를 불렀다. 체감상으로 세 시간은 맞은 느낌이다. 나는 앓아 누웠다. 가슴 통증으로 숨이 안 쉬어졌다. 아무도 가게 뒷방 문을 열어보는 사람은 없었다. 뒷방에는 뒷골목으로 이어지는 문도 있었다. 나는 모두가 잠들었을 때 뒷골목으로 나왔다. 그리고 전혀 친하지 않은 친구에게 가서 며칠을 지내었다. 그것이 나의 첫 가출이었다.
사춘기가 으례 그렇다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결국은 드러날 일을 잠정적으로 미루는 어리석고 안타까운 행위를 사춘기의 특성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나라는 존재에게는 성장 난이도가 있다.
가출과 출가. 사실상 집을 떠난다는 공통된 의미가 있는데, 가출은 여러번 하고 출가는 한번 하는 것 같다. 그때 나의 첫 가출은 출가이기도 했다. 나는 가족이라는 것, 집이라는 것의 비밀을 알아버렸다.
부끄러운 개인사 하나를 또 쓰고 말았다. 이렇게 글을 쓰는 것, 말을 하는 것. 그렇게 말을 함으로써 나를 이해하는 일. 산더미 같은 부끄러움들 속에서 한주먹 집어서 보여주는 행위. 이 한주먹이 다는 아니지만, 다가 아니니까. 이 정도로만 하는 것.
폴란드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는 <방랑자들>에서 "나는 말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표현한다. 잊어버리고 싶은 어떠한 죄악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표현되어진 죄악은 구원을 받은 거라고. 그런데, 과연 누구의 죄악인가? 죄악의 기준은 무엇인가?
안에서 그리고 밖에서, 자신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모든 상황을 일일이 털어놓고 모든 상태를 명명하라. 단어를 찾고 그것들을 입에 올려라. ....
"나는 말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는가? ...
잊어버리고 싶은, 수치스러운 복도로 우리를 내모는 그 문들을 저주하라. 그 어떤 몰락이나 죄악도 부끄러워하지 말라. 입에 올려진 죄악은 이미 사함을 받은 것이다. 말로 내뱉어진 생명은 구원을 받는다. ...
말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항상 덫에 걸리는 법이라고.
올가 토카르추크 '말하라! 말하라!' <방랑자들> 민음사 273-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