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스러운 악마
엄마는 매우 실용적인 사람이었다. '쓰잘데기' 없는 공부를 하는 것을 몹시 못마땅해했다. "넌 맨날 공부만 하니"하는 말을 자주 했다. 정말 공부를 많이 한 것은 아니고, 취업을 못해 돈벌이를 못하는 나를 채찍질하는 말이었다. 엄마는 내가 말처럼 달리기를 원했고, 나는 고양이처럼 털을 핥고 있는 것을 좋아했다.
쓰잘데기 있는 일을 해서, 쓰잘데기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행복이었나 보다. 엄마의 나이가 된 나도, 나도 모르게 나에게 쓰잘데기를 요구하곤 한다, 세상 쓰잘데기 없는 글쓰기를 좋아하다니, 글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걸 보니.
십여 년 전이다.
오랜만에 친구 M을 만났다. 고등학교 때부터 좋아했던 데미안을 닮은 친구였다. 십여 년 전 그 무렵 나는 소설 등단 이후 생계 수단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시간이 훌쩍 지나면서 너무나도 실용적인 일만 하다가 죽을 것 같아서, 살려고 몸부림치는 표독스러운 고양이처럼 소설을 하나 썼던 때였다. 초고를 쓰고 어떻게 출판을 해야 할지 매일이 고민이던 때 M을 만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오랜만에 회포를 풀며 추억을 떠올렸다. 고등학생 때 무슨 쓸데없는 말장난 같은 걸로, 예를 들면 숙명이니 운명이니 뭐 그런 걸로 밤새 대화를 하곤 했던 때를 떠올렸다. 그의 방에는 자그마한 창문에 하늘이 보였고, 우리는 "하늘이 넓게 보이는 큰 창문이 있는 집에서 사는 것"이 꿈이었다. 그러다가 내가 소설을 썼다고 말했다.
"책을 내고 싶어, 근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
도움을 원하는 말은 아니었고 자랑도 아니었다.
어쩌면 자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M은 고등학생 때 주간 잡지에 소설을 연재했었다. 정확히 말하면 '수기'라는 제목의 소설. 글에 관해서 비교한다면 내가 M에 대해 어쩌면 열등감이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남들은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열등감이 아니라 존경심이었다. 너무나도 명백히 글을 잘 썼으니까.
M이 말했다.
"책은 아무짝에 소용없어."
나는, 책을 내는 게 중요한데 왜 그렇게 말을 하느냐고 했고, 그다음에 무슨 말로 대화를 이어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대충 기억나는 것은, 바로 위의 오빠가 죽었다는 것, 사십구재 하는 날 어떤 신비한 체험을 했다는 것과 오빠의 아이들과 크리스마스를 보냈다는 얘기들.
지금 생각하면 모든 것이 회의감이 드는 때였을 것이다. 나는 그때 '책을 내고 싶다'는 '삶'에 관해서가 아니라, '죽음'에 관해서 이야기를 했어야 했다.
죽음에 관해 대화를 계속했던 것도 같다. 하지만 서운하게 했던 말은 나에게 악의적인 말로 둔갑하여 내게 남았다. 이제 M은 데미안 같은 M이 아니었다. 그냥 평범한 M.
글이라고 하는 불은 자신감으로 활활 타오르고 회의감에 의해 꺼진다. 내 안에서 나를 떠나지 않는 악마, 나의 악마는 회의다. 악마는 아주 사라지지는 않으니 아껴줘야 하겠다. 사랑스러운 나의 악마. 악마와 사이좋게 지내기 위한 주문을 써본다.
오늘 당신의 마음을 세우는 문장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