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권 정밀 검증 1장 (372-378쪽)
"나는 저항한다. 나는 나 자신이 이처럼 속이 텅텅 빈 무(無)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 나는 무엇인가? 나의 나는 무엇인가?"(칼 융 <레드북> (부글북스) 372쪽)
3권 정밀검증의 1장은 융의 자아로 보이는 '나'와 셀프로 보이는 '나의 나'가 서로 뜨거운 이야기를 나누는 내용이다. 그 뜨거움은 읽는 우리에게 뜨끔하게 하고 찔리게 하고 부끄럽게 하면서 동시에 시원함을 느끼게 한다.
우리의 존재가 얼마나 초라하고 참을 수 없을 만큼 구태의연하며 어리석은지를. 그래서 고통스럽고 그래서 터무니없이 오만하기까지 하다. '나의 나'는 '나'에게 "적절한 자존감이 전혀 없다는 것"이 문제라고 말하며, 스스로 자존하지 못한다면 삶이 비참하게 여겨질 것이므로, 노력하라고 한다. 노력하지 않으면 '나의 나'는 끊임없이 '나'를 채찍질을 하고 고문할 것이라고 말한다.
'나의 나'는 '나'에게 "껍질을 벗길 기회"(373쪽)를 준다.
"너의 허영심이 보이지 않아?", "고통은 이제 막 시작"이다. 인내심이 부족하니까 "인내심을 배우도록 하기 위해 고통을 배로 늘릴 것이다. 또한 고통 속에서도 "너는 침묵을 배워야 할"(374쪽) 것이다.
그리고 영리한 척하면서 하는 자기기만과 투사와 합리화. 겸손한 척하는 거만함과 "위선적인 평정심", 주변의 행복을 시기하면서 그렇지 않은 척하는 모습.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느끼면서 책임감은 전혀 느끼지 않는 모습, 이기심과 욕망, 병적인 사랑 등 우리의 껍질을 벗기며 보게 한다.
'나의 나'는 '나에게 말한다. "나는 네가 너의 수치심에 대해 말하기를 원하고 있어."(377쪽) 나의 나는 나가 자랑스러워하는 것들을 태워버리고, 텅 비게 만든다. 텅 빈 비참과 공백 속에서 이제 "생명의 그릇"이 되라고 한다.
"자유는 너의 것이 아니야. 형식이 너의 것이야. 권력은 너의 것이 아니야. 고통과 깊은 고민이 너의 것이야. 너는 자기 비하에서 미덕을 끌어내야 해."(377쪽)
나는 진창길을 걷는다. 미끈미끈한 진흙길이다. 나는, 차라리 그냥 죽 미끄럼 타듯 내려갈까, 생각을 하며 아주 조심조심 걷는다. 멀리 바다가 보인다. 나는 바닷가의 작은 마을에 살고 있다. 혼자 쓸쓸하게 살고 있다. 입안이 씁쓸하고 누군가 몹시 그립다. 바닷가 오른쪽에 공중전화 부스가 보인다. 하늘색 테두리의 공중전화 부스 안은 환하게 불이 켜져 있다. 나는 그곳으로 간다. 통화를 한다. 주위를 둘러본다. 나는 이 바닷가 유배지에 홀로 외롭고 쓸쓸히 머물고 있다. 미끈거리는 진흙길에는 작은 돌조각 하나 없다. 나는 이 길을 아이처럼 미끄럼을 타며 놀 수도 있다. 하늘에는 별과 달이 떠 있고, 고요하게 잠든 마을에는 군데군데 전등이 켜 있다. 찰박찰박 규칙적인 바닷물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내 앞에 흑인 여성이 왔다. 진회색 정장 슈트를 입고 머리를 단정하게 뒤로 빗어 넘긴 젊고 지성적이며 적당한 근육질의 남성적인 여성이다. 나는 빌딩 안의 사무실에 앉아 있다. 법에 관해 의논할 일이 있어서 이곳을 찾은 것이다. 내 앞에 앉은 그녀가 말한다. 자 말씀해 보세요. 그녀는 법에 관한 심사관 혹은 변호사다. 나는 그녀를 알고 있다. 오래전에 만난 적 있다.
2025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