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권 정밀 검증 2장 (378-384쪽)
저항과 분노를 지나 '나'는, "나 자신과 홀로 있는 것을 견뎌내기 시작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칼 융 <레드북> 378쪽)
그리고 안개에 싸인 영혼의 목소리가 들린다. 영혼은 불확실한 길에서 가능성을 발견하며 그것이 창조력의 원천이라고 말한다. '나'는 '나의 나'와 함께 땅을 내려다보며 고통으로 짓눌리는 것을 느끼고, 또 어떤 목소리를 듣는다. 목소리는 '나'에게 예견한다.
"너는 생명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될 거야." (379쪽)
연금술의 여정에서 황금이 된 다음의 과정을 상징적으로 장미꽃, 펠리컨, 십자가로 표현한다. 하지만 그 길은 고통의 여정이며, 물론 고통은 기쁨으로 변화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생명의 길을 가는 것은 전쟁터와 다름없는 고통이라고 불평한다. 영혼이 말한다.
"그건 너의 약함 때문이고, 너의 의심과 불신 때문이야. 너의 길을 계속 지키며 너 자신으로부터 달아나지 않도록 해. 세상엔 신의 의도가 있고, 인간의 의도가 있어."(381쪽)
그렇다고 무조건적인 믿음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자신만의 길을 발견하고, 그러는 과정에서 자신의 건너편에 있는 낯설고 강한 이상한 것들을 만나고 있기 때문에, 영성적인 믿음과 인간의 지식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영혼의 말을 듣는 '나'는 광기가 두렵다. 그러자 영혼이 말한다. 광기를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지만 '나'는 여전히 불안하고 고독에의 두려움도 있다. 영혼은 이미 예측했던 어두운 고독을 수용하기를 원한다. 결국 '나'는 고독에 저항해 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자 흰 수염의 노인이 등장한다. 이 노인은 "이름 없는 존재", "고독 속에 살다가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였다.
융이 이렇게 '나의 나'와 영혼과 노인을 만난 것은 1914년 5월 25일 밤이었고, '고통'과 '슬픔'의 시간은 그 후 한 달이 지나도록 이어졌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의 고통과 슬픔을 감지했던 것이다.
나는 좁고 질척한 길에서 아이처럼 논다. 네댓 명의 아이들이 나와 함께 한다. 나는 좁은 그 길을 지나 나가려다가 문득 잃었던 신발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되돌아가 녹은 얼음들과 물이 있는 길에서 신발을 찾는다. 신발은 검은색이다. 정장 구두처럼 보이지만 밑창과 뒤꿈치는 트래킹화이다. 삶은 그렇게 가는 것이다. 앞에서 보이는 것은 번듯하게 보이는 정장 구두 같은 것이지만 실상은 삶의 뒤에서 또 밑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트래킹을 하듯 걷는 것. 나는 신발을 집어 품에 안고 정원의 문을 나온다.
나오자마자 건너편 건물에서 소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아치형의 문 안쪽에서 살인이 벌어지고 있다. 어떤 청년이 분노에 차서 한 사람을 죽인다. 아치형의 문 안쪽 벽에 피가 튄다. 무시무시한 장면을 목격하는 나를 살인자가 본다. 나는 옆 건물로 달려간다. 가운데 건물의 옥상을 건너뛰고 옆 건물로 들어간다. 그곳에는 둥근 테이블 앞에 한 남자가 책을 보고 앉아 있고, 이 카페의 주인이 일련의 소동을 눈치채고 계단을 내려온다. 나는 이 남자를 보는 순간, 그가 살인자 청년의 아버지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둥근 테이블의 남자는 조금의 미동도 없이 앉아 있다. 테이블 위에는 어떤 책이 있다. 95라는 숫자가 크게 눈에 들어온다.
20260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