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시와 접안

--아르튀르 랭보Arthur Rimbaud의 <견자>

by 시인 이문숙

친구 진희의 아들 산하가 45분 뒤면 날짜변경선을 넘는다. 날짜변경선. 나는 잠시 이런 달력을 상상한다. 날짜가 없는 순백의 달력. 그래서 어떤 특별한 기록을 하면서 완성되는. 나는 오늘 21일이라는 무의미한 숫자 대신 ‘오늘 산하가 날짜변경선을 넘다’라고 그 빈 공백에 적어둔다. 2l일이 물에 든 미역처럼 특별해진다.

배에는 3등항해사와 2등항해사, 일등항해사, 선장이 있다. 하긴 조타수도 있겠지. 표류하기 직전 아스라이 ‘이건 아니야’ 말해주는.

견습생 산하가 맡은 것은 ‘견시見視’다. 보고 뚫어져라 본다. 아르튀르 랭보Arthur Rimbaud의 <견자>처럼 본다본다본다. '모든 길고 엄청나고 이치에 맞는 착란처럼 투시자'가 된다. 혼절할 정도로 본다. 그때 눈은 유순한 욕망과 환치될 수 없는 슬픔과 오돌도돌한 미뢰의 시간을 맛본다. 간헐적 단식의 시간들. 그 시간의 고불고불한 창자들.

‘견시’가 봐야하는 건 레이더가 볼 수 없는 작은 섬이나 암초다. 얼어붙은 허공을 날아가는 새들이 그 시린 날개를 지는 해에 대고 가듯, 그렇듯 눈은 렌즈에 대여져 있어야 한다. 뒤늦게 발견된 섬이나 암초 앞에서 <산타마리아>호 같은 대형 선박은 급히 방향을 틀 수 없다. 그러다간 전복될 수밖에 없으니.

신의 팔레트 같은 카불의 도시와 신의 이빨 같은 산들, 신의 유선이거나 혈관인 강과 냇물, 검은 그물망 스타킹의 무희들, 그 얼굴을 덮고 있는 기미 같은 포구의 그림자. 산하는 날짜변경선을 넘어 과테말라로 가고 있다. 과테말라. 페루페루. 과테말라. ‘말라’의 금지된 세계. 차별과 배제의.

어느덧 나도 산하의 배에 탑승해 있다. 파랗다온통파랗다하늘과바다가경계없이파랗다.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토할 것만 같은 블루. 그 블루에 나포되면 설원의 링반데룽ringwanderung이 시작된다. 눈이 그걸 이겨내지 못하면 덜커덕 암초에 걸리고 만다. 사일렌의 노래가 시작된다. 매혹의 광폭한 블루.

그런 것들이 두려울 즈음이면 배는 ‘접안接岸’을 시도한다. 해안에 접속하는 것, 접안을 할 때, 그 발광하는 블루는 잠시 멈춘다. 접안의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작은 물건들은 통통배들이 실어온다. 큰 화물은 직접 배가 접안하여 싣는다. 배에는 해적도 침입할 수 없는 거대한 알바트로스의 날개가 있어 그 날개를 접고 편다.

나는 나의 노란눈펭귄에게 말한다. 흰당구지꽃에게 속삭인다. 빙퇴석처럼 간명한 아침에게 불러준다. ‘접안接岸’은 ‘접안接眼’이다. ‘접안接眼’은 ‘견시見視’다. 잘 견시해야지만 볼 수 있다. 우리 앞에 놓인 작은 섬과 홀연한 방해자들. 잘 견시해야만 한다.

때때로 접안의 방식은 달라진다. 통통배와 조정이 가능한 배의 날개. 통통배는 미세한 시선을 운반하고 접안의 거대한 배는 보이지 않는 미래를 적재한다.

며칠 전 책상 위에서 덮어두지 못한 사뮈엘 베케트. ‘쿼드’는 배우들의 걸음의 방향을 도면으로 보여준다. 견시한다. 하얀 망토를 입은 사람들의 발소리. 망망대해의 블루같은 발소리. 커터기의 칼날처럼 바람개비처럼 도는 우직하고 단아한 발소리. 가끔은 사람의 말소리가 아닌 이런 발소리를 듣고 싶다. 견시하고 싶다, 그 소리에 눈을 대고 싶다. 접안하고 싶다.

새들은 페루에 가지 않아도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의 대형건물 처마에 모여산다. 새들의 희고 말간 모호한 배설물에도 건물은 부식한다. 균열이 오고 조금씩 무너져 내린다.

하얗고 섬세하고 내밀하고 고요한 실선 같은 날짜변경선.


*랭보 서한집

아르튀르 랭보 저 / 위효정 역 | 읻다 | 2021년


*무라카미 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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