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네스 클라크의 '그림을 본다는 것'
점은 무엇일까. 점각시나방, 점박이무당벌레, 점점점 커지다.
소설 동백꽃. 걱실걱실한 점순이의 바위를 그 바위의 무게를 노랗게 비워 휴일의 애드벌룬처럼 띄워 올리는 생강나무 덤불.
구두점으로서 점은 구획하고 포획한다. 생각이 아라베스크처럼 이어지며 패턴화하려 할 때, 점은 단호하다. 상투적으로 변해가려는 문장을 휘감아 끊어준다.
점은 검투사처럼 예리하다. 어떤 것에 쉽게 동화하거나 순치되려는 생각의 폭발을 경계한다. 먼저 깊게 방공호를 파내려간다. 마구 번져나가려는 사유의 방화에 사닥다리를 올린다. 지금은 불의 활화산을 진화할 때라는 걸 알려준다.
그러나 구두점의 단호한 점과는 다른 쇠라Georges pierre seurat의 점묘법. 케네스 클라크Kenneth clark는 '그림을 본다는 것looking at pictures'에서 쇠라는 감정의 개입을 경계한다. 오히려 사소한 양산의 끝이나 의자의 옹이 같은 사물에 매혹되었다고 쓴다.
나는 딸이 내셔널 갤러리에서 선물로 사온 엽서, 쇠라의 '아스니에르에서의 물놀이 Une Baignade, Asnières'를 조용히 들여다본다.
점들은 이합집산하지 않고 감정이입을 거절한다. 물 속에 반쯤 들어간 아이의 입나팔 소리. 물이 사람의 육체나 요트의 선체에 부딪는 소리. 그 소리들을 ‘양산의 끝'으로 눌러 고정한다. 세밀한 점들은 잔디의 뾰족한 끝을 둔화한다. 안개 속 세세한 물방울로 덮는다. 누워있는 사람이 여성인지 남성인지 알 수 없는 중성화된 '인간의 휴식'을 고요 속으로 밀어넣는다.
고요의 서랍 속에 차곡차곡 개켜진 셔츠와 양말. 그처럼 움직임 없는 왁자함. 1885년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에서 점점점 색체를 갖추고 심화해가는 쇠라의 점들.
이러한 쇠라와 점심 한끼를 나눈다면, 쇠라는 그 세심하고 나른한 오후에 대해 뭐라고 말할까. ‘점심을 나눈다’’는 말의 현혹. ‘점심'의 점. 서로의 마음에 양방향 방점 찍기. 쇠라의 오후는 소박한 정찬을 앞에 놓고 고단하게 ‘직설적인 하루’를 건너가는 위축된 영혼들과 마주앉게 한다. 그들 사이로 따뜻한 물 흐르는 섬의 적요가 액자처럼 걸린다.
점심의 점. 점 속 달그락거리는 수저와 그릇 부딪치는 소리. 그렇게 점은 스스로 청각화한다. 혀 아래 놓이는 고요한 침. 그렇게 미각으로 감각되기도 한다. 그 점은 점점점 밋밋했던 관계가 도도록해지는 것처럼 부푼다. 만지면 올록볼록한 촉감으로 다가온다. ‘새파란 침’ 같은 특별한 점으로 변이해 나간다.
점의 화가인 쿠사마 야요이는 어렸을 때 부모로부터 매를 너무 많이 맞았다 한다. 눈을 뜨면 세계가 거뭇거뭇한 점으로 뒤덮혔다. 그 점에는 회초리 소리에 난청이 된 소녀의 비명이 송두리째 갇혀 있다.
이때 점은 가혹하게 귀로 들리는 점이다. 바닷가 모래해안에 놓인 거대하게 샛노란 호박 위의 점. 그 점은 가혹한 햇살에 점점 오그라진다. 위축된다. 거친 파도의 격렬비열도 같은 숨소리에 점점 비대해진다. 거칠어지며 증폭된다. 괴성을 지른다.
그 점은 태양처럼 이글대고 달의 분화구처럼 움푹하다. 금성처럼 왜소하고 목성처럼 거만하다. 자체적으로 번식하고 분화하며 창궐하는 점들.
때로 개밥바라기처럼 침울하다. 명왕성처럼 해왕성처럼 철썩거리는 쿠사마 야요이의 점들. 그 점들은 왜 무의미한 성운처럼 지루한 반복을 멈추지 못할까.
그녀는 외면하고 싶은 이 '점들의 현상학'을 통하여 자신의 상처를 들여다본다. 그 응시의 절벽을 기어 올라가 점의 라푼젤이 된다. 가파른 성루를 짓고 오랫동안 점과 자신의 상처와 대화를 한다.
쿠사마는 점을 반복적으로 연원없이 그린다. 공포스러웠던 점은 그 혼돈과 무질서의 나열 속에서 가지런하게 정돈된다. 그 점들의 아우성이 하나 둘 하나의 '행성'으로 승화되는 걸 그녀는 보았다고 한다.
그녀가 그가 혹은 지극히 주관적인 내가 고통을 유리안치하거나 피폐의 세한도 속에 갇히려 한다. 그때 빙 둘러서는 점은 청동 탑에 갇힌 다나에에게 쏟아지는 황금비의 신탁처럼 운명적이다.
그럴 때면 나는 딸과 함께 폭우를 맞으며 갇혀있던 몬주익 성의 과묵한 돌들을 생각한다. 그 폭우를 피해 신발을 벗어들고 몬주익 성을 빠져나와, 홀딱 젖은 옷과 맨발로 마주섰던 후앙 미로Joan miro의 그림. 노란 바탕 위 파란 아우라에 싸여있던 그림 속 검은 점. 그리고 초록 바탕에 박혀 있던 빨간 점.
<골든 블루로 감싸진 종달새의 날개가 다이아몬드가 박힌 목초지에서 자고 있는 양귀비의 심장에 닿다>
그림의 제목은 길고도 아름다웠다. 내밀한 신화를 품고 있었다. 제목을 알지 못하면, 저 안에 어떤 상상이 숨어있는지 불가지했던 검은 점. 지저귀는 종달새의 사랑 노래는 지금쯤 양귀비의 심장에 도착했으려나.
도달을 모르는 '애탐'의 다이아몬드는 머나먼 행성에서 이곳으로 건너올 것이다. 하나의 광물질로 번쩍거리며 여기 손가락 위에 놓여.
미로의 또 다른 그림 제목 ‘붉은 태양이 거미를 갉아 먹는다.’
시간 거미가 우리를 옥죄며 다가온다. 우리는 신문택시를 타고 유리넥타이를 맨 사람들. 귓속에서는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를 듣는 거대한 점 속의 사람들. 존재의 도달 미수자들. 좌절의 촛불을 껐다 켰다 하는 소심한 실패자들. 그리하여 하루하루 일 분 일 초의 점화와 점묘는 더 고귀하고 중대한 것이 아닐까.
케네스 클라크는 렘브란트의 자화상을 본다. 책의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맺는다. '저 딸기코가 나를 꾸짖는다. 내 도덕률은 얼마나 부박한가. 게다가 옹졸하기 그지없는 소갈머리에. 그 입 다물라.'
오늘 딸기코 위의 점은 '그 입 다물라'의 점이다. 낡고 해지고 반복되는 비루한 일상에서 점점점점점 마침표의 말줄임표의.
*그림을 본다는 것
케네스 클라크 저 / 엄미정 역 | 엑스오북스(XOBOOKS) | 2012년
'Polka-dots can't stay alone; like the communicative life of people, two or three dots become movement... Polka-dots are a way to infinity, a way to peace.'
Wishing Yayoi Kusama a beautiful 93rd birthday! Together with WePresent, learn more about Kusama's life, work and wellbeing: https://bit.ly/3qmEo3S -Ta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