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은 꿰지 말아요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
벽이 아플까봐 못을 못 박는 사람인가요. 액자는 걸지 않고 바닥에 세워두나요. 11월 때 모르는 장마가 돌풍을 동반한다는데. 유리가 덜겅대며 울렁댈까 미리 깨끗이 빤 수건을 틈에 끼워두는 사람인가요.
아휴, 잡풀조차 못 뽑는 이라고요. 혹시 땅두더지가 머리 깨질까봐요. 두더지가 땅 속에서 무지개를 볼 수도 있으니까요.
어떤 설문지를 보고 놀란 마음의 우물은 도저히 ‘소제掃除’가 되지 않아. 갑자기 나는 청소라는 말 대신 ‘소제’라는 이제는 잘 쓰지 않는 말을 소환한다. 마을의 공동우물은 한 해 한 번씩 사람들이 내려가 ‘소제’를 하곤 했는데. 그때 심지어는 동물의 잔해까지 나와서 끔찍했는데.
아니야, 이런 기억은 좀체로 기분이 안 나. 좋은 기억을 하자. 그래 팔꿈치를 살짝 담가 물이 뜨거운지 가늠해. 목간이 끝날 때까지 식지 않을 그 온도의 물로 몸을 씻어. 마지막으로 보들해진 귀지를 파주며 누군가가 말했지. ‘소제’가 끝났네. 이제 귀가 밝아졌으니 좋은 소리 많이 들으렴.
그날 설문의 결과는 이랬다. 보랏빛 애도의 물결에 대해 ‘대체로’ 관심있다와 대체로 관심없다’의 비율이 비등비등한 걸 보고 며칠째 맥이 스러졌다. 놀라 맨드라미처럼 자빠졌다. 관자놀이가 뛰지 않았다. 낙엽이 곱다는 말이 싫었다.
왜 ‘대체로’라는 말을 그 설문의 두 번째, 세 번째 항목에 달아야만 했을까. ‘대체로’라는 말을 그야말로 ‘소제’해내고 다시 그 설문의 소리에 귀를 댔다. 그런데, 기묘하게 그 말미가 두루뭉술해졌다. ‘대체로’ 요즘 대세라는 탕후루 같아. 마구 버려진 꼬치와 끈적임이 껌자국처럼 신발에 달라붙어 골치라는데.
일주일 내내 버려진 탕후루의 세계가 펼쳐진다. 꼬치에 과일을 꿴다는 발상이 어줍어서 아직 먹어보지 못했지만, 누구나 물고 지나가다 내버린다. 쓰레기 봉투에 꽂힌 꼬치가 가을 벼메뚜기 잡아 풀에 꿰기의 표절인 것만 같아. 색색가지 과일 꿰기.
탁탁 튀는 메뚜기를 산 채로 잡아 날카로운 풀에 꿰던 어린 마음이여. 나약한 사람들은 그걸 못해 논가 보랏빛 여뀌풀 노래에나 귀를 열지.
그렇다고 ‘그렇게 나약해’ 어쩔래 하며 눈을 흘기지는 않았지. 오히려 너 같은 애가 보랏빛 당나귀가 지고 가는 짐을 내려주지 그랬다. 맞아, 그랬어. 짐 내려놓고 젖은 흙발을 털게 한다구. 보랏빛 당나귀를 훨훨 날게 하지는 못해도, 그 하루만은, 한 나절만은, 그 밤 10시 그 시각에는.
당나귀가 날아다니는
힘센 고함이 춤추고 나약한 현재를 갉아먹는
기묘한 사건이 여기저기 피어있는
-유현아 ‘표절’
며칠째 ‘소제’라는 말을 꼬옥 끌어안고 보랏빛 당나귀처럼 걸어봤다. 꿀럭꿀럭 골목길이 좁아졌다. 숨이 차고 진땀이 났다. 탕후루의 과일들처럼 한 알 한 알 뽑혀나가 바닥에 버려졌다. 아아아아, 이러다간. 죽겠구나.
멀리 나뭇잎 형상의 평상이 보였다. 보랏빛 튀튀를 입은 두 꼬맹이들이 그 위를 왔다갔다하는 게 그 아래서 보였다. 춤을 추는 것도 아닌 것도 같았다. 빗자루를 들고 있는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오늘이 마지막 출근이라 인사하러 온 청소 아주머니의 말처럼
바닥도 공중도 아니 어정쩡한 빈 곳에서 마지막을 쓰는 일
-유현아 ‘표절’
며칠 전 보았던 게 겹쳐올랐다. 꼬부라진 할머니 한 분이 공중화장실 벽에 걸려있던 대걸레를 낑낑 들고 음수대로 갔다. 흙발을 닦으라고 청소미화원이 걸쳐놓은 호스로 걸레를 빨았다. 할머니가 신발을 벗고 걸레 위로 올라가 자신의 무게를 이용해 요리조리 물기를 짜냈다. 그걸 끌고 올라가 나뭇잎 평상을 닦았다. 깨끗이 소제했다.
그 할머니가 작아져 튀튀 입은 꼬맹이가 되었을까. 멀리서 보니 남실남실했다. 다가가 보니 웬일인가, 꼬맹이들이 떨어진 솔가지를 들고 평상을 쓸어내고 있었다. 춤추는 빗자루 같았다. 평상이 정갈해지며 점점 넓어졌다. 우주의 모든 아픈 먼지들아, 다 여기 와서 쓰러져 누우렴. 그리고 쉬렴.
꼬맹이들이 다시 할머니가 되었다. 할머니가 아가들에게 물었다. 아가야, 어찌 솔가지를 빗자루 대신 사용할 줄 알았누. 할머닌 그것두 모르세요. 이 솔가지가 빗자루의 마음을 닮았잖아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대체로 모른다와 대체로 모르지 않는다’는 설문이 ‘모르지 않다’로 바뀌었다. 깨끗이 ‘소제’된 나뭇잎 모양의 평상에 보랏빛 낙엽들이 쌓였다. 찌륵했다.
낱말들을 주워 손안에 가득 가둔 다음 두 손을 가차없이 뻗는 일
-유현아 ‘표절’
찌륵한 것이구나. 이렇게 찌륵한 것이구나. 아이를 떼놓고 일나간 엄마가 수유할 때가 되면 흰젖이 찌륵 돌듯 손을 내뻗게 되는 이날은 얼마나 오래 표절을 반복해야 그칠 것인가. 그 언어들이 보랏빛 블라우스에 남긴 손톱만큼 작은 누런 젖얼룩.
어제의 시간은 뒤집어지고 공간이 생기는 곳에
구멍 하나 만들어 잠을 자는
-유현아 ‘표절’
풍성 플라자 미화원들이 계단 아래 좁은 공간에 모여있다. 전기방석만한 공간에 몸을 붙였다. 지나가다 보면 빨간 전기밥통에서 김이 솟았다. 구수한 밥 익는 냄새가 났다. 밥 잘 됐다, 어서 먹자.
비록 몸을 펼 수는 없었지만 그 계단 아래에서 보랏빛 당나귀들이 날아다니는 걸 보았다.
할머니가 아니 꼬맹이들이 깨끗이 청소해논 아니, 이 말로는 부족하다. 정갈하게 ‘소제’해 논 평상에 보랏빛 낙엽들이 쌓였다. 분명 빨간 색도 노란 빛깔도 아닌 보랏빛 낙엽들이.
*끌로드 모네, 다리 워터루
* 유현아 , 슬픔은 겨우 손톱만큼의 조각. 창비, 2023
#이태원1주기#애도와 참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