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19가 우리에게 왔을 때

소설 페스트로 바라본 코로나 19

by 배재윤


zoom 화상회의로 동아리 친구들을 만났다. 화면에 비친 친구들의 모습을 낯설어했던 때가 언제였을까. 화면 속 친구들의 모습이 이젠 익숙하다. 한 친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진짜 나는 이 화상회의도 5월이면 다 끝날 줄 알았다? 근데 봐봐. 우린 아직도 이러고 있잖아. 이러다 영영 못 만나는 거 아니야?” 친구의 말을 듣고 문득 알베르 카뮈가 쓴 소설 《페스트》가 생각났다. 친구가 탄식하며 뱉었던 말이 소설에 그대로 녹아 있었기 때문이다. 《페스트》는 1940년대 오랑 시에 페스트가 창궐한 사건을 다루고 있다. 오랑 시의 폐쇄조치가 무기한 지속되자 사람들은 이런 반응을 보였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단조로운 감정만 느꼈다. 이제 끝날 때도 됐는데 하고 시민들은 되뇌었다. 재앙 기간에 집단적 고통이 끝나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하기도 하고. 또 실제로도 그것이 끝나기를 바랐던 것이다. 가혹한 시간이었다. 결국은 무기력 상태로 돌아가 페스트 속에 틀어박혔다.”


알베르 카뮈는 70년 전에 코로나 19 사태를 예견했던 걸까. 페스트란 단어를 코로나로 바꿔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소설 속 등장하는 여러 가지 상황이 지금 시국과 너무 비슷하여 소름이 돋을 정도다. 카뮈는 2차 세계대전의 끔찍한 경험을 페스트로 표현했으며 전염병, 전쟁과 같은 재앙이 닥쳤을 때 일어나는 대중들의 반응을 사실적으로 묘사했고 카뮈는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신경 인류학자 박한선은 《페스트》를 굉장히 사실주의적인 소설로 평가했다.


“소설을 보면 재미를 위해 과장되게 묘사하거나 과학적으로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요. 그런데 페스트는 전염병이 퍼졌을 때 일어나는 집단적 심리적 반응을 정확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페스트》는 소설이기에 결말이 있지만 코로나 19는 우리가 직면한 현실이며 아직 진행 중이다. 우린 이 사태를 어떻게 하면 잘 마무리 지을 수 있을까. 박한선은 감염병을 대하는 대중의 반응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감염병이 퍼지면 대중은 ‘혹시 내가 감염되진 않았을까.’라는 불안이 생깁니다. 그리고 혐오가 생기죠. 감염되거나 감염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배제하거나 멀리하려는 본능이에요. 이러한 대중의 심리 변화가 소설에 아주 잘 드러납니다.”


감염병으로 인한 불안에 대해 명확히 짚어보자. 《페스트》에서는 대중의 불안한 심리상태를 잘 표현했다.

“예전보다 술 소비량이 엄청나게 늘었다. 어느 카페에서 양질의 포도주가 세균을 죽인다고 써 붙였다, 전염병을 예방하는 데 술이 효과적이라는 것을 이미 상식처럼 받아들이던 대중에게 그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 새벽 두 시쯤이면 술꾼들이 카페에서 쫓겨 나와 거리를 메웠다.”


술을 마시면 균이 죽을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이란에서 실제로 일어났다. 소독용 알코올을 마셨단 사실에 더 충격이다. “이란에서 5011명이 소독용 알코올을 마셨다. 525명이 사망했고 95명이 실명했으며 405명은 신장에 문제가 생겨 투석 치료를 받고 있다. 게다가 고농도 알코올 섭취로 인한 사망자 수가 매우 많았다. 이란 보건부 대변인은 알코올 섭취는 코로나 19 치료법이 아니고, 오히려 치명적일 수 있다고 경고했다.” 우리는 불안이란 감정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면 상대방을 향한 혐오로 드러난다. 혐오가 드러난 소설 속 대목을 그대로 가져왔다.


올빼미 신사 오통 씨가 한동안 보이지 않더니 이번에는 훈련받은 강아지 같은 두 아이만 데리고 호텔에 나타났다. 사정을 알아보니, 그의 아내가 친정어머니를 간호했지만 결국 돌아가셨고, 아내는 지금 격리되어 있었다. “마음에 안 들어요.” 지배인이 호텔 투숙객인 타루에게 말했다.
“격리 중이든 아니든 그 여자도 감염되었을 수 있잖아요. 결과적으로 저 사람들도 마찬가지라고요.”
타루는 지배인에게 그런 관점에서 보면 모든 사람이 다 의심스럽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지배인은 단호했고, 그 문제에 대해 매우 확고한 관점을 갖고 있었다.
“아니에요, 선생님. 선생님이나 저는 의심스러울 게 없지만, 저 사람들은 그렇지 않죠.”


혐오의 감정은 사이버 공간에서 잘 드러났다. 악성 댓글로 비수를 찌른 것이다. 대구에 코로나 19에 감염된 두 아이의 엄마가 있었다. 그녀는 대부분의 생활을 집에서 보냈는데도 코로나 19에 감염되었다. 원인은 남편이었다. 그는 회사 동료로부터 감염되었고 발열 증상 없이 심한 근육통과 감기를 앓았는데 다름 아닌 코로나 19였단 사실이 드러났다. 그녀는 아이들 걱정에 눈물이 났다. 바이러스에 대한 두려움보다 앞으로의 격리 생활과 추가 감염 가능성에 대한 불안으로 잠을 설쳤다. 그녀의 경로가 세상에 공개되었다. 대중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왜 이렇게 싸돌아다녔냐. 아프면 집에 가지 병원에 들렀다가 마트는 왜 가냐.”


그녀는 나뿐만 아니라 대구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위축되고 상처받았을 사람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고 고백했다.


사람들의 불안은 혐오로 번졌다. 그런데 우리가 혐오해야 할 대상은 코로나지 결코 사람이 아니다. 감염자는 우리가 혐오할 대상이 아닌 격려해야 할 대상이다. 다행히도 그녀가 브런치에 남긴 글에는 응원하는 댓글이 가득했다.


“이 또한 지나갈 거예요. 더 건강해지셔서 예쁜 아가들이랑 만나시길 바랄게요.”, “확진자의 글을 처음 읽어봐요. 죄송한 마음이 드네요. 걸릴 걸 알면서 돌아다닌 사람들을 원망했던 사람 중 한 명이었습니다. 이렇게 마음고생을 하시는 분들이 많았을 거란 생각이 드네요. 얼른 완치하시길 바랍니다."



코로나 19는 개개인이 아닌 모두가 함께 직면한 문제이다. 이 사실이 개인의 불안과 타인을 향한 혐오에 굴복되어서는 안 된다. 이 사태를 감염자 개개인의 문제로 돌릴 것인가? 이것은 우리의 양심의 문제이다. 소설에서도 페스트를 이길 유일한 방안은 우리의 양심을 지키는 일이라고 말한다. 소설 속 랑베르란 인물의 시점으로 살펴보자. 그는 타지에서 온 신문기자이다. 페스트로 오랑 시가 봉쇄되자 꼼짝없이 도시에 갇혔다. 그는 의사 리외에게 자신이 페스트에 걸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소견서를 떼어달라고 부탁했다. 자신의 고향에 사랑하는 아내가 있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리외는 랑베르가 병에 걸렸는지 안 걸렸는지 판단할 수 없기에 확인서를 써줄 수 없다고 거절했다. 랑베르는 리외에게 화를 내며 말했다.


“서로를 사랑하는 두 사람에게 이런 이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선생님은 아마 이해하지 못하실 거예요. 선생님은 다른 사람의 사정은 생각하지 않고, 헤어진 사람들을 고려하지도 않으세요. 두고 보세요! 저는 반드시 이 도시에서 나가고 말 겁니다.”


랑베르는 불법적인 방법으로 탈출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다 오랑시의 정세를 파악해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의사 리외와 민간인 보건자원봉사대를 조직한 타루를 집으로 초대했다. 랑베르는 타루가 조직한 보건대 이야기를 듣고 코웃음을 쳤다.


“당신들은 지금 영웅놀이에 빠져있군요. 나는 영웅주의를 믿지 않아요. 내가 관심 있는 건 사는 것. 오로지 사랑하는 것을 위해 죽는 것입니다.” 그러자 리외는 피곤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랑베르! 이 모든 일은 영웅 놀이와 관계없습니다. 이것은 성실성의 문제예요.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입니다. 성실성이란 그저 자신이 맡은 직분을 완수하는 것이죠. 나는 의사니까 사람들을 치료할 뿐이에요. 타루는 보건대의 일원으로서 아픈 사람들을 돕는 것이고요.”

리외가 자리를 나갔다. 타루가 그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가려다 생각이 바뀐 듯 신문 기자에게 몸을 돌리며 말했다. “리외의 부인이 여기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요양소에 있다는 걸 아십니까?” 다음 날, 아침 랑베르는 의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도시를 떠날 방법을 찾을 때까지 선생님과 함께 일해도 괜찮겠습니까?”


추측하건대 랑베르는 깨닫지 않았을까. 혼자서 행복하다면 수치스러울 수 있다고. 다른 사람이 이토록 슬픈데 어떻게 혼자 행복을 찾을 수 있냐는 말이다. 결국 그는 탈출의 기회가 찾아왔음에도 오랑시에 남기로 결정했다. 그가 의사 리외에게 남긴 말이 인상 깊었다.


“나는 이 도시에서 이방인이니까 여러분과 아무 상관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이제 내 경험에 비추어 원하든 원치 않든 나도 이곳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이 사건은 우리 모두와 관련되어있으니까요.”


2차 세계대전 당시 출처가 밝혀지진 않았지만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던 시가 있다. 여기서 그들은 나치를 말한다. 세상의 부조리를 대하는 당시 사람들의 방관적 태도를 보여줬다.


그들이 처음 공산주의자들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에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에 그들이 유대인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에
마침내 그들이 나에게 왔을 때, 그때는 더 이상 나를 위해 말해줄 이가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지금 우리의 양심은 어떠한가? 난 시를 이렇게 고쳤다. 여기서 그들은 코로나 19를 의미한다.


그들이 처음 우한에 찾아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우한 시민이 아니었기에.
그들이 대구를 찾아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대구 시민이 아니었기에
그들이 이태원을 찾아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그들과 아무 관련이 없었기에
마침내 그들이 나에게 왔을 때, 그때는 더 이상 나를 위해 말해줄 이가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지금 당장은 나와 아무 상관 없는 일처럼 보일 수 있다. 나는 감염자가 아니니까. 하지만 지금도 의사 리외처럼 성실히 자신의 직분을 수행하는 분들이 계신다. 타루처럼 민간인 보건대를 조직하여 환자를 돌보는 분들도 분명 존재할 테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지금 당장 민간인 보건대를 조직하자는 말이 아니다. 코로나 19사태가 우리 모두의 일이라 인식하고 함께 연대하자는 것이다. 감염자에겐 이겨낼 수 있다는 따듯한 말 한마디를. 거리를 나갈 때는 답답하더라도 마스크를 꼭 쓰고 나가기를. 그리고 이 사태가 어서 진정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기를 바라는 것 말이다.




마스크를 쓰고 거리를 걸었다. 이렇게 써진 문구를 봤다. “몸은 멀지만 마음은 가깝게” 나는 저 문구가 우리의 진솔한 양심이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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