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햇살 Oct 03. 2023

의사 스트레스

어쩌다보니 병원 다경력자가 되었다. 아빠의 알츠하이머로 신경과에 모시고 다녔다. 어느 날 요관이 막혀 응급실로 실려 간 이후 비뇨기과, 순환기내과, 신장내과, 심장내과, 신경과의 협진을 받게 되었다. 그 후 아빠의 고관절 골절로 정형외과가 추가되었는데 병원에 갈 때 두 명의 보호자가 붙어야 했다. 직장인 두 명이 조퇴나 휴가를 내려면 일정 맞추기도 쉽지 않지만 맞춘 일정 속에서도 시간 확보를 위해 여러 사람에게 부탁할 일이 남는다. 부담을 무릅쓰고 차근차근 해결해 병원에 도착하면 더 큰 부담이 기다린다. 의사들이다. 정확히 말하면 의사들의 권위적인 태도 때문이다.


나와 아빠는 의사가 시키는 대로 검사하고, 진료받으러 오라면 시간 맞춰 가고, 먹으란 약과 받으란 치료를 꼬박꼬박 따른다. 안 그러면 큰일이 날 것만 같아서 말 잘 듣는 아이가 된다. 의사에겐 흔한 일상이겠지만 우리는 처음 겪는 일이라 불안하고 걱정이 많아 궁금한 것도 많은데 담당의에게 뭐 하나 물어볼라치면 단련된 것처럼 스킬을 날린다. 


스킬1: 질문하는 말허리는 일단 끊는다. 말투에는 화와 짜증을 담는다. 그러면 환자가 얌전히 듣는다.

스킬2: ‘넌 설명해도 모를 테니 시키는 대로 하라는 요지의 말’을 2배 속으로 한다. 그러면 추가 질문을 막을 수 있다.

효 과: 환자와 보호자가 1-2분 내로 진료실에서 나간다.     


환자에게 의사는 절대 권력자다. 우리는 무시받는 느낌과 고압적 태도 앞에서도 한마디 항의를 해본 일이 없다. 의사가 하라는 대로 해야 아빠가 나을 테니까. 의사 앞에선 한없이 작아진다. 한마디 대꾸도 못하고 돌아서 나오노라면 속이 부글부글. 아침밥이 턱 얹히고 두통으로 머리가 지끈하다. 좋아질 일은 없고 최선을 다해 현상 유지를 하는 82세의 아빠를 돌보는 일상은 하루하루 커가는 아이를 돌보았을 때의 일상에 비해 고단함은 훨씬 덜한데도 기운날 일없이 소모되는 느낌이다. 아픈 것만으로도 힘든데 의사한테까지 이렇게 스트레스받아야 하나 병원 노이로제로 다시 병원을 가야 할 지경. 


내 스트레스 지수를 최고로 높인 의사는 종합병원 심장내과의였다. 예약일인데 아빠가 골절로 움직이지 못해서 서류를 준비해 대리처방을 받으러 간 적이 있다. 


“그래서, 담부터 계속 이렇게 환자는 안 올 생각입니까?” 스킬1,2를 능숙하게 쓰고는 마무리로 다그치듯 묻는데 그 말이 ‘너 이러면 안 되지. 계속 이렇게 할 거니?’하며 혼을 내는 느낌이었다. 그동안 아빠와 같이 가면 정작 질문은 아빠가 아닌 내게 했고, 갈 때마다 같은 처방을 하는데 아빠가 같이 오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의사인 너한테 뭐가 그렇게 다르냐, 골절로 못 걷는데 그럼 기어서 오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입을 다문다. 진료를 받으려면 환자가 직접 와야 하는 게 당연하니까. 환자 입장 좀 헤아려달라고 말하기도 구차했다.

한번 겪고 나면 다음부턴 의사의 방 앞에만 가도 심장이 조여드는 느낌이 들면서 뒷목과 어깨가 다 뻐근해진다. 종합병원 의사 중에 그런 경우가 더 많은데 진료실 앞 전광판에는 화자의 이름 옆에 ‘*분*초 지연되고 있습니다’하는 자막이 계속 흐른다. 2분 남짓 머물렀을 뿐인데도 지연에 쫓겨 의사가 무엇에 화를 내는지, 환자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서로는 서로의 말을 들을 시간이 없다.



나이가 들면서 나도 점점 병원 갈 일이 많아진다. 병원에 가면 하라는 검사가 많은데 정말 필요한 건지 의사가 돈 벌려고 하라는 건지 의심스럽다. 자궁에 혹이 생겼을 때 혹이 아닌 자궁을 들어내라는 의사 말대로 하지 않고 다른 의사에게 가서 혹만 깔끔히 제거한 경험 때문에 믿음이 깨졌다. 같은 여자니까 여자의 입장에서 잘 진료할 것을 기대하고 산부인과엔 여의사로 선택했는데 오산이었다.


그 후 수술을 권하면 그냥 쉽게 수술하라고 하는 건 아닌가 해서 다른 의사를 찾아 최소 두 군데는 가본 후에야 최종 결정을 하게 되었다. 허리 협착 수술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엄마는 아빠가 다쳤을 때 수술 결정을 미루셨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여기저기 알아보다 2주가 흘러 아빠의 척추뼈가 더 내려앉았다. 의사를 신뢰했다면 처음 수술하라 했을 때 얼른 했을 것이고, 그럼 지금처럼 아빠의 허리가 굽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니 속상했다.

믿지 않을 수도, 전폭적으로 믿을 수도 없는 의사와 병원. 환자가 많아야 의사와 병원이 돈을 버는 시스템이 아니고 환자가 건강할수록 의사에게 보상이 돌아가는 구조라면 지금보다 훨씬 의사를 신뢰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에 쫓기며 조급한 마음으로 환자를 보는 상황이 아니라 환자당 의사의 수가 넉넉해서 의사가 여유 있는 상태라면 환자의 뭘 모르는 질문에도 지금보단 짜증을 덜 내지 않을까. 의사와 환자 사이의 지식 차이로 권력을 휘두르는 고압적 의사가 아니라 환자가 주체적으로 결정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신뢰로운 조언자이자 친절한 동료였으면 좋겠다. 


무엇부터 바꿔야 하는지 알고 싶다. 의사들의 반응은 어리둥절하고 답답하기만 하다. 작년에 우리나라 인구당 의사의 수가 OECD 평균에 한참 모자라니 의사 수를 늘리자는 제안이 나왔을 때 대한의사협회 등 의사단체가 강력 반대를 했던 기사를 본 일이 있어서다. 해법이 나오는 동안 약한 쪽이 고통을 견뎌야 한다는 게 더 아프다.


매거진의 이전글 존엄한 마무리는 어떻게 하는 걸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