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8월 27일 첫 녹음을 하다
(이 글의 시리즈는 특정 채널 성공 스토리가 아닙니다. 중소 팟캐스트 채널 운영자가 유튜브, 포스트, 브런치 등 다양한 플랫폼 활동을 하면서 책을 내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것입니다. 어쩌면 대다수일 보통의 직장인이 어떻게 하면 자신의 채널을 운영하면서 커리어 업그레이드를 하는지 고민을 하자는 취지가 담겨 있습니다.)
팟캐스트가 소개된 시점은 꽤 오래됐다. 애플이 아이팟을 소개하면서 ‘팟캐스트’라는 단어로 인터넷라디오라는 개념을 갖고 왔다. 일반 사람들이 대중에 올리고 이를 공유하는 플랫폼이 유튜브였듯 팟캐스트는 일반 사람들의 재기 넘치는 목소리를 고유하고 큐레이션 해주는 애플의 플랫폼이자 고유명사였다.
한국에서도 애플 아이폰이 보급되던 2009년말부터 팟캐스트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소수 아이폰 마니아가 쓰는 정도로 대중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TV와 라디오 등 기존 영상과 음성 매체가 훨씬 강세였다.
팟캐스트가 본격적으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던 때는 2011년 ‘나는 꼼수다’에서 비롯되면서부터다. 팟빵을 국민적인 팟캐스트 플랫폼으로 키웠던 김동희 대표도 한국 팟캐스트 역사의 시작점을 ‘나는 꼼수다’로 잡고 있다. 그가 팟빵을 큐레이션 플랫폼에서 팟캐스트 호스팅 플랫폼으로 키우기 시작했던 때도 ‘나는 꼼수다’를 들으면서부터다.
◇나는꼼수다, 팟캐스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계기
모바일로 라디오와 MP3 음원 외 다른 음성 매체를 듣는다는 게 희귀했던 그때 ‘나는 꼼수다’는 신선했다. 김어준과 정봉주, 주진우, 김용민 씨의 입담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대통령을 소재로 다양한 풍자와 사회적 고발을 할 수 있는 매체가 방송국이 아닌 일반 개인이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게다가 ‘나는 꼼수다’의 인기는 놀라웠다. 마땅한 수익원이 없고 서버 트래픽 유지 비용도 2021년 지금보다 훨씬 비싼 10년전이란 점을 고려하면 대단한 성과였다. 방송국이 아닌 사람들의 콘텐츠가 전 국민적인 인기를누릴 수 있다니...
이때부터 우후죽순처럼 팟캐스트를 표방한 다양한 콘텐츠들이 나왔다. ‘나는 꼼수다’를 패러디한 ‘나는 꼽사리다’부터 ‘나는 의사다’ 식의 콘텐츠도 나왔다. 팟빵 같은 플랫폼에서 팟캐스트를 위한 호스팅을 해주면서 일반 사람들도 쉽게 팟캐스트 플랫폼을 시작할 수 있게 됐다.
그 즈음 나도 마찬가지였다. 뭐라도 하나 해서 관심을 끌고 싶어했던 터. 2009년 조명산업신문이라는 조명전문지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던 나는 2010년 이데일리 프랜차이즈팀을 거쳐 2011년 이데일리 편집국 정보산업부 기자를 하고 있었다. 텍스트가 갖고있는 답답함과 한계를 그때부터 느꼈다.
실제 당시의 젊은 기자들 사이에서 팟캐스트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할 말 많은 경제기자나 정치부 기자들이 나왔다. 얼굴이 공개되지 않은 채 목소리만 나온다는 점과 이미 많은 사람들이 듣는 대중화된 플랫폼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문제는 콘텐츠와 같이할 사람들이었다. 나 자신도 바빴고, 입담 좋은 지인도 사업으로 눈코 뜰 새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더욱이 방법도 몰랐다. 어떻게 녹음을 해서 편집을 하는지. ‘합시다’라는 말만 했지 실제로 하기에는 현실적으로 난관이 많았다. 내 자신의 콘텐츠에 자신이 없던 때였다.
◇기폭제가 됐던 라디오방송
그렇게 세월이 흘러 2014년 라디오방송을 하나 맡게 됐다. 잘리지 않고 2년째 진행하다보니 어느정도 자신감이 생기기도 마련. 특히 이미 만들어진 대본을 갖고 읽는 정도야 어렵지 않게 됐다. 라디오라는 매체가 갖는 장점에 대해서 어렴풋하게 알아갔다. 전국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듣는다고 하지 않아도 소수의 청취자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그들을 타깃으로 얼마든지 다양한 콘텐츠를 만들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아 가던 때였다.
그 즈음 종종 라디오방송국에 직접 가 스튜디오에서 생방송으로 진행해볼 기회도 갖게 됐다. 앞서 방송에 특출난 선배가 잠시 휴가를 가던 때 ‘땜빵’을 부탁하고 갔던 것. TBS 라디오 방송사에 3일 정도 경제 브리핑을 해주는 기자 패널로 갔다.
서울 수도권을 대상으로 하는 생방송이지만 방송이 주는 경험 자체는 경이로웠다. 좁은 기자실 부스 안에 있다가 다양한 스텝들과 정규화된 스튜디오는 색다른 경험이었다. 방송전 가슴을 짓눌렀던 압박감이 방송후 웬지 모를 성취감으로 다가왔다. 방송 작가나 PD의 반응이 어떻게 됐던 간에 ‘그 압박감을 이기고 잘 끝냈다’라는 성취감이 있었다. 물론 부끄러울 정도의 딕션과 목소리였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묘한 희열을 느꼈다.
때마침 2012년에 팟캐스트를 같이 하자고 했던 지인이 해외 사업을 정리하고 한국에 들어와 잠시 쉬던 때였다. 새로운 사업을 하기 위해 이래저래 고민하고 있던 때에 팟캐스트를 얘기했다. "같이 채널을 키워서 같이 해보자"는 제안이었다. 네이버나 다음에서 카페를 키워 이를 비즈니스의 발판으로 삼으렸던 그에게 이 제안은 솔깃했다. 그리고 곧 합류하게 됐다. 나는 ‘김기자’로 그는 ‘형님SJ’로 닉네임을 정했다.
2016년 정도 되니까 팟캐스트 제작법 등이 이미 블로그를 통해 많이 공개돼 있었다. 팟빵도 월 1만원 유료이긴 했지만 간편했다. 팟빵 그 자체도 이미 안드로이드 계열에서는 애플 팟캐스트를 능가할 정도로 커진 플랫폼이었다. 팟캐스트를 하려고 처음 시도했던 2012년보다 여러모로 팟캐스트에 대한 정보가 많아졌고 시장성 면에서 커져 있었다.
첫 녹음은 형님SJ가 사용하는 사무실에서 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보험대리점 사무실에서 스마트폰에 마이크를 끼고 서로 간에 떠드는 식으로 했다. 대본도 없었고, 각자 생각을 말하는 식이었다.
들어주면 고맙고, 그렇지않아도 섭섭해하지 않을 시작이었다.
지금도 조촐하지만 그때는 더 조촐했다.
(무반응 그 자체인 첫 팟캐스트. 유튜브에도 동시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