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 에세이]
계절이 바뀌면 내가 늘 하는 일이 있다. 철 지난 옷은 장롱 깊숙이 넣고 다가오는 계절에 입을 옷을 이동식 옷걸이에 거는 일이다. 옷 정리를 마치고 신발장 문을 열었다. 목이 긴 부츠나 미끄럼 방지 기능이 있는 두툼한 구두는 잘 싸서 박스에 넣었다. 통기성이 좋은 여름용 운동화나 샌들은 가운데 칸에 놓았다. 내가 여름에 가장 즐겨 신는 구두는 구멍이 숭숭 뚫려 있어서 바람이 잘 통하고 발 모양에 맞게 늘어난 탓에 온종일 신어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흰색 구두다. 맨발로 신을 수 있어서 특히 선호한다. 지난가을 수선하지 않고 넣어두었는지 굽이 많이 닳아 있었다.
우리 집 근처 전통 시장 안에 솜씨 좋은 아저씨가 하는 구두 수선 가게가 있다. 찢어진 곳을 재봉틀로 꿰매 주기도 하고 염색도 해 준다. 하얀 구두 굽갈이를 하러 갔더니 문이 닫혀 있었다. 옆에 있는 채소가게에 물어보았으나 언젠가부터 나오지 않았는데 왜 안 나오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사무실 가는 길에도 구두 수선 가게가 있다. 지하철역에서 내려 사무실로 가다 보면 인도 한쪽에 구두수선 부스가 있다. 한겨울을 제외하고 부스의 문은 늘 열려 있었다. 열린 문 사이로 자그마한 체구의 노인이 고개를 수그리고 구두를 들여다보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나는 할아버지에게 굽갈이를 맡기기로 했다. 구두를 비닐봉지에 싸서 배낭에 넣었다.
아침 출근길이었다. 잔뜩 찌푸린 하늘에서는 금방이라도 빗방울이 떨어질 거 같았다. 우산까지 넣었더니 배낭이 빵빵했다. 지하철역에서 나와 몇 걸음 걷기도 전에 빗방울이 투두둑 떨어졌다. 우산을 펴들고 할아버지 가게를 향해 걸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가게 문이 닫혀 있었다. 나는 비가 와서 할아버지가 하루 쉬시는구나 싶었다. 그런데 다음날에도, 다다음날에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출근길이면 항상 문이 열려 있었는데……. 이상하긴 했지만 나는 단순히 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올해 오월에는 하루걸러 비가 내렸다. 오월은 계절의 여왕이라는 말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하루, 이틀, 일주일, 열흘이 지났다. 5월 31일에도 할아버지 가게는 여전히 문이 닫혀 있었다. 하얀 구두는 비닐봉지에 담긴 채 사무실 책상 아래 처박혀 있었다.
6월 1일 아침이었다. 가게 문에 근조, 상중이라는 네 글자가 붙어 있었다. 아하, 상을 당하셨구나. 그래서 문을 열지 않으셨구나. 조만간 문이 열릴 테고, 그러면 나도 내 하얀 구두를 신고 다닐 수 있겠구나 싶었다.
6월 2일 아침 가게 앞에 하얀 카네이션 세 송이가 얌전하게 놓여 있었다. 퇴근길에 보니 카네이션 옆에 광동 쌍화탕 한 병이 놓여 있었다. 다음날 보니 흰 카네이션 다발이 하나 더 있었다. 노란색 사탕도 서너 개 놓여 있었다. 누군가 하얀 타일 두 장을 갖다 놓았다. 타일로 만든 상 위에 사탕이 더 놓였다. 카네이션이 시들 무렵 흰 국화가 놓였다. 작고 소박한 꽃다발이 하나둘 늘어났다.
사무실에서 구두수선 가게와 흰색 카네이션과 쌍화탕과 사탕에 대해 말했다. 그 사실을 아는 직원은 없었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다고 했다. 꽃이나 사탕, 쌍화탕을 가져다 놓은 사람들이 모두 고객이었을 거라는 내 말에 젊은 후배가 틀림없이 그럴 거라고 말했다. 할아버지가 정말 인자하고 마음씨 좋은 분이었다는 거다.
몇 년 전 후배는 큰맘 먹고 값비싼 이탈리아제 구두를 샀다. 밑창까지 모두 가죽으로 만들어진 빨간색 뱀가죽 구두는 예쁘고 발이 편했다. 그런데 밑창까지 천연가죽이다 보니 미끄러웠다. 대리석 바닥은 물론이고 물기만 조금 있어도 몹시 미끄러웠다. 후배는 미끄럼 방지 고무 밑창을 대 달라며 할아버지에게 구두를 맡겼다. 구두를 찾으러 갔을 때 할아버지는 고무창을 대지 않은 구두를 내밀었다. 자세히 보니 원래의 가죽 밑창에 가로로 촘촘하게 홈이 파여 있었다. 할아버지는 고급 구두에 고무창을 대면 가치가 떨어져서 안 된다고 하셨다. 얼마를 드리면 될까요? 하고 후배가 물었을 때 할아버지는 아무 재료도 든 게 없으니 돈을 받을 수 없다고 하셨다고 한다. 말을 끝낸 후배가 사무실을 뛰쳐나갔다. 퇴근길에 보니 싱싱한 하얀 카네이션이 놓여 있었다. 쌍화탕 한 병과 함께. 후배가 가져다 놓았다는 걸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나는 한 번도 할아버지에게 구두 수선을 맡긴 적이 없었다. 재봉틀이 있는 거로 미루어 예전에 구두를 만들던 제화공이었구나, 짐작만 했다. 폭 1.6m, 길이 2.8m, 높이 2.1m. 서울시가 정한 구두수선방 규격이다.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좁은 부스 안에서 일 년 열두 달 일해야만 한다. 고무 밑창을 대는 건 몇 분이면 할 수 있지만, 일정한 간격으로 가늘게 홈을 파는 작업은 훨씬 많은 공을 들여야 한다. 그런데도 할아버지는 돈 한 푼 받지 않았다. 자신의 직업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만이 그런 처신을 할 수 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에 긍지를 느낀 적이 없었다. 월급을 받기 위해 마지못해 시키는 일만 했다. 할아버지의 반의반만큼이라도 내 일을 사랑했더라면. 그랬다면 조금 더 행복했을 텐데.
할아버지 생전에 한 번도 수선을 맡기지 않은 걸 후회했다. 구두를 고치지 못해 후회하는 게 아니라 할아버지와 말 한마디 나누지 못했던 걸 후회한다. 따뜻한 정을 나누지 못한 게 한스러웠다. 사무실 책상 밑에 두었던 구두를 집으로 가지고 갔다. 나는 구두를 신발장 맨 위 칸에 넣었다. 언젠가 할아버지처럼 자기 일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굽갈이를 맡기기 위해서였다.
어버이날이 되면 우리는 빨간 카네이션을 가슴에 단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사람들은 하얀 카네이션을 단다. 할아버지 가게 앞에 흰 카네이션을 놓은 사람들은 할아버지를 아버지처럼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할아버지에게 하얀 카네이션을 바친 사람들이 있어서 슬프지 않았다.
고단한 몸을 달래기 위해 할아버지가 마셨을 쌍화탕. 할아버지는 얼마나 자주 쌍화탕을 드셨던 걸까. 내일은 나도 흰 카네이션 옆에 쌍화탕 한 병을 놓아야지. (바람의 눈과문,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