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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신 Feb 18. 2024

음악에 갇힌 남자

[단편소설]

‘오르간 연주하는 여대생 실종. 스토킹 범죄가 의심되니 빨리 들어올 것.’ 

기용의 휴대폰에 메시지가 떴다. 뒤이어 여자의 사진이 전송되었다. 피부가 희고 눈이 큰 미인이었다. 실종 신고가 워낙 많은 탓에 긴급하다고 여기지 않으면 외근 중인 형사를 불러들이지 않는다. 

기용이 서둘러 들어갔을 때 팀원들이 이미 모여 있었다. 신고자는 실종자의 지도 교수였다. 정기 연주회가 2주밖에 남지 않았는데 소식이 끊긴 지 열흘이 지났다. 티켓 판매 중이고 광고도 나간 상태다. 무대에 서겠다는 열정이 엄청나게 강한 아이가 스스로 잠적했을 리 없으니 꼭 찾아달라는 내용이었다. 

“신당역 스토킹 살인 사건 때문에 온 나라가 시끄럽잖아. 문제 생기면 절대 안 되니 제발 잘하라는 서장님 지시야.”

기용도 단순 실종 사건이 아니라고 느꼈으나 지금 맡은 일도 있는데 또 시키니 짜증이 났다. 팀장은 신입인 이석을 붙여 주었다. 가족관계등록부상 어머니는 일 년 전 사망했고 아버지는 등재되어 있지 않았다. 친구들을 만나고 온 이석이 카카오톡 대화 내용을 메일로 받았다고 보고했다. 모두 실종자를 걱정하고 있어서 흔쾌하게 협조해 주더라면서…. 

“부모나 가족에 관한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고, 반지하 원룸에서 살고 있고, 알바를 하면서도 하루도 연습을 쉬지 않는 악바리였대요.”

“그런데 왜 잠적했을까?”

“그 이유를 알아내면 절반은 푼 거죠. 알바를 좀 요상한 데서 했더라고요. 토킹바 아시죠?”

“위치는?”

“여의도라는 것만 안대요.” 

“가게마다 돌아다녀 보자.”

기용과 이석은 열 번째 빌딩에서 실종자가 일했던 토킹바를 찾았다. 진토닉 한 잔에 만오천 원, 300mL 맥주 한 병에 만 원. 술값이 싸다. 상대적으로 건전한 곳이라는 의미다. 기용은 맥주를, 이석은 진토닉을 시켰다.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주인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묻어 있었다. 

“여기서 일하는 애들은 보통 반년 정도 하다 자리를 옮겨요. 그 애도 다른 일거리를 찾았다며 톡으로 그만 나오겠다고 하더군요. 요즘 애들이 그래요. 도대체 기본이 안 돼 있어요.”

“다른 일거리라면?”

“음악하는 애니까 결혼식장이나 행사장에서 피아노를 치거나…. 요즘 음악회 같은 결혼식이 유행이잖아요.”

그런 일이 항상 있는 건 아니지 않느냐고 물었지만, 여주인은 저야 모르죠, 라며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친구와 나눈 카톡에는 후원자를 찾았다고 적혀 있던데 뭐 아는 거 없어요?”

“스폰서? 그런 말은 못 들었는데요. 여기 나오는 애들이 모두 바라는 거죠. 손님하고 이야기할 때 메타버스라는 말을 많이 하더라고요.”

“메타버스?”
   “새로 나온 게임 같던데.”

이석이 기용에게 어서 나가자고 눈짓했다. 

“더 물어볼 건데 왜 나오자고 한 거야? 정보도 없이 어떻게 찾으려고?”

“메타버스 한다면서요? 친구 찾기 하면 돼요.”

메타버스가 뭔지 정도는 기용도 알고 있다. 주민등록번호가 00으로 시작되는, 디지털 원주민이라 불리는 Z세대가 메타버스 업체의 주요 고객이라는 사실도 안다. 이석이 찾아낸 그녀의 닉네임은 ‘토카타와푸가’였다. 화면을 보던 이석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의 아바타가 너무 화려하고 사치스럽다는 거였다. 

“핸드백부터 옷까지 모두 명품인데다가 머리띠도 세계적인 브랜드 제품 같아요.”

“???”

“선배님, 요즘은 메타버스에서 샤넬이나 구찌 같은 명품뿐만 아니라 자동차도 살 수 있어요. 오프라인 매장 못지않게 값도 비싸요. 저 머리띠도 엄청 비쌀 거예요.”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

“선배님도 해 보세요. 체험해 봐야만 알 수 있어요. 말로 설명하기 어려워요. 저는 돈도 벌어요. 수입이 짭짤하다니까요. 인터넷 게임 하고는 차원이 달라요. 이용자가 재화로 표현되는 가치의 생산자도 되고 소비자도 되거든요.”

“그러니까 네 말은 실종자가 그 속에서 돈을 많이 벌지도 모른다는 거 아냐. 벌어서 쓰는지도 모른다는 말이잖아.”

“맞아요. 현실에는 없는 디지털 공간이지만 오프라인에서 하는 모든 일을 할 수 있어요.”

기용은 수사를 위해서라도 가입해야 했다. 이석은 다양한 종류의 벨트를 팔고 있었다. 기용은 현금을 충전해서 가상화폐로 바꾼 다음 이석의 벨트를 사 주었다. 아바타가 벨트를 찬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어색했다. 바지와 점퍼도 사야 할 거 같았다. 모자와 선글라스까지 사고 나니 충전한 금액의 절반이 날아갔다. 신기하다기보다 어이없었다.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어쩌려고 이러는 건지….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로 세상이 떠들썩했던 게 불과 5년 전이었다. 

“실종자가 몸에 두르고 있는 것들, 한 2,000만 원어치 정도 되겠네요. 이렇게 거금을 벌려면 아주 특별한 걸 팔아야 해요. 후원자를 구했다는 말이 이건지도 모르죠.”

“충전하는 건 알겠는데 여기서 번 돈은 어떻게 환전하지?”

“금돈 500개가 10만 원예요. 십만 원 단위로 정산해 줘요.”

“업체에 협조 요청 공문 보내. 실종자 친구도 되고.” 

업체는 ‘토카타와푸가는 한 달쯤 전부터 접속하지 않았다, 아바타를 꾸민 물품은 모두 자우어오르간에게서 선물 받은 거다, 토카타와푸가가 먼저 자우어오르간에게 말을 걸었고 친구 요청을 했다, 자우어오르간도 비슷한 시기에 접속이 끊겼다, 그 외에 특별한 사항은 없다.’ 라는 회신을 보내왔다.

“자우어오르간 신상 정보 요청해. 그런데 보통 닉네임을 정할 때 자신에게 의미 있는 단어로 하지 않아? 자우어오르간, 영어인가?”

자우어오르간은 60대 IT 기업 명예회장이었다. 강남의 주상복합 아파트에 살고, 두 번 상처했고, 두 아내에게서 딸 한 명씩을 얻었고, 딸들은 모두 미국 시민권자였다. 기용과 이석은 남자의 아파트로 갔다. 아파트 출입구를 지키는 보안요원이 남자를 못 본 지 한 달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CCTV가 직원의 말을 증명해 주었다. 남자의 회사로 가서 사장을 만났다. 연봉을 받고 일한다는 사장은 사망한 두 아내가 모두 음악가였다는 사실과 자주 가는 식당이 어딘지 정도만 안다고 말했다. 

기용과 이석은 식당으로 갔다. 식당 주인은 김 회장이 사라졌다는 말에 별로 놀라지 않았다. 두 번이나 사별했으니 살기 싫을 수도 있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첫 부인이 죽었을 때 엄청나게 힘들어했는데 2년 만에 재혼해서 놀랐고, 잘 살기를 바랐는데 재차 상처했다고 해서 또 놀랐다고 했다. 신기하게도 두 아내는 모두 건반악기 연주자였다.

“혹시 김 회장과 친하게 지낸 지인이나 그런 사람 알고 있나요?”

“회장님을 우리 식당에 데려온 여자 동창이 있는데요, 그분 덕에 김 회장이 우리 식당 단골이 되었죠. 이 근처에 사세요.”

“여기로 오시라고 하면 안 될까요?”

커피 한 잔을 다 마시기도 전에 겨자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여자가 선뜻 나온 건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기 때문이리라. 식당 주인이 그녀를 맞았다.

“사모님, 형사님이 김 회장님에 대해 알고 싶으시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정기용이라고 합니다.” 

기용이 신분증을 보여주었다. 

“지금 김 회장이 어디 있는지 아세요? 행적을 추적 중입니다만.”

“몰라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달려 온 거예요.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였는데 너무 가여워요. 신은 왜 착한 사람에게 더 가혹하게 구시는 걸까요? 인생을 다 바쳐서 사랑했던 사람을 두 명이나 잃었으니 살고 싶겠어요? 제발 빨리 찾아 주세요.”

“두 번이나 사별하셨더군요. 그것도 교통사고로. 운이 나쁘다고 해야 할지, 처복이 없다고 해야 할지…. 사고 경위나 당시의 상황에 대해 아시는 것 모두 말씀해 주세요.”

“첫 부인은 미국에서 사고가 났고요, 둘째 부인은 3년 전에 강원도에서 사고가 났어요. 김 회장은 그때부터 회사를 전문 경영인에게 맡기고 방황하기 시작했어요.”

“여기 사장님 말로는 엄청난 애처가였다고 하던데.”

“애처가죠. 두 여자를 교수 자리에 올려놓느라 얼마나 정성을 쏟았는지 아는 사람은 다 알아요. 첫 아내는 미국으로 유학까지 보냈어요. 기러기 아빠가 된 거죠. 미국 집에 파이프오르간도 설치했다더라고요.” 

“가정집에 파이프오르간이라. 엄청나네요.”

“마치 아내에게 헌신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어요. 일 년에 두 번 이상 연주회를 열어 주었는데 모든 준비를 직접 했죠. 드레스 코드까지 김 회장이 정했다니까요.” 

“애처가 맞는 것 같네요. 혹시 무슨 소식 들으면 바로 알려 주세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이에요. 꼭 알려 주셔야 해요. 걱정되어서 잠도 못 잘 것 같아요. 참, 김 회장과 친하게 지내던 첫 아내 친구가 있어요.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예요. 음악 하는 사람이니 뭔가 도움 되는 말을 해 줄지도 몰라요.”

기용은 단서가 되는 말을 듣지는 못했지만 새로운 참고인을 찾은 것으로 만족했다. 수사란 원래 이런 것이다. 수많은 낚싯대를 드리워 놓고 한 마리라도 잡히기를 바라는 낚시꾼의 마음과 형사의 마음이 다르지 않다.

“여자들이 모두 자유가 없었네요.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는 로봇 같잖아요. 나라면 그런 사랑 원하지 않았을 거 같아요.”

이석이 혀를 차며 한마디 툭 던졌다.

“뭐야? 잘해줘서 싫다는 말이야?”

“그건 아니고. 그냥 그렇다고요. 저는 메타버스를 더 파 볼래요.”

김 회장 아바타는 고불고불한 갈색 머리를 어깨까지 늘어뜨린 젊은이였다. 이석은 아바타의 안경은 라운드 프레임의 수제품이고, 수트는 E사의 최고급품이며, 커프스 링크는 사파이어가 박힌 명품이라고 했다. 영국 왕실에 납품하는 업체의 시계와 물방울 모양의 다이아몬드 반지는 각각 수천만 원을 호가할 거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돈만 처들이면 사람들이 좋아할 줄 아나. 이 인간 완전 속물이네.”

기용이 짜증을 냈다.

“실종자와 비슷한 시기에 접속이 끊겼다는 게 어쩐지 수상해요.”

“그렇긴 한데 물증이 있어야지. 전과도 없고 벌금 낸 기록도 없어. 교통 위반 딱지 한 번 뗀 적이 없으니 파 볼 방법이 없어. 출입국 조회는?”

“했어요. 국내 어딘가에 있어요.”

“바이올리니스트를 만나 보자. 뭔가 건질 수 있을지도 모르니.”

바이올리니스트는 주로 김 회장의 취향에 관해 말했다. 

“클래식 애호가인데 국내에 몇 개밖에 없는 앰프와 스피커를 가지고 있어요. 바흐의 파이프오르간 곡을 특히 좋아했어요. 첫 아내가 토카타와 푸가 BWV565를 연주하던 날 완전 반했다고 말했어요. 하얀 건반 위를 거침없이 달리는 손가락과 현란한 발놀림이 마치 바흐를 보는 둣했다면서요.”

“자우어오르간이 뭔지 아세요?”

“아, 바흐가 생전에 연주했던 파이프오르간이죠. 자우어라는 사람이 만든. 왜요?”

“메타버스에서 자우어오르간이라는 닉네임을 쓰더라고요. 바흐를 좋아했고 그중에서도 파이프오르간 곡을 좋아했다니 이제 이해가 되네요.”

“그의 아내들은 돈을 벌기 위해 레슨을 할 필요도 없었고, 자녀 양육에 힘을 쏟을 이유도 없었어요. 가사도우미에 보모에 가정교사까지 있어서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연주만 하면 되었거든요. 친구가 집에 파이프오르간을 설치했다고 했을 때 정말 부러웠어요.” 

메타버스에 파이프오르간에 바흐라니. 기용은 한숨이 나왔다. 범인을 잡기 위해 알아야 할 게 너무 많다. AI 형사라도 만들어야 하나….

“그럼 혹시 토카타와 푸가가 뭔지도 아세요?”

“바흐가 작곡한 오르간곡이죠. 디즈니 애니메이션 ‘판타지아’에도 나오는.”

기용은 처음으로 바흐와 오르간이라는 말이 귀에 쏙 들어왔다. 음악에 문외한이라 그동안 귓등으로 흘려들었다. 실종자가 오르가니스트라는 사실이 무엇보다 중요한 단서였다. 

“친구가 너무 일찍 저세상으로 가서 안타까웠는데 김 회장이 금방 재혼해서 놀랐어요. 사람 마음이 그렇게 간단하게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로 옮겨갈 수 있나? 의아했고, 두 번째 아내의 부고를 받았을 때는 두려웠어요.”

“김 회장은 왜 오르간이나 피아노를 치는 여자하고 결혼했을까요? 그렇게 좋아하면 본인이 직접 하면 되잖아요.”

“시도는 했어요. 잘 안되니까 연주하는 여자와 결혼했다고 말한 거 같아요. 대리만족을 얻기 위해 그런 것 아닐까요?”

“김 회장이 어디로 갔을까요?”

“모르겠어요. 혹시라도 나쁜 마음을 먹은 건 아닌지 걱정돼요. 두 번이나 사별했으니 얼마나 괴로울까 싶다가도 음악이 그를 위로해 주지 않을까 희망을 품곤 했는데…. 빨리 찾아 주세요. 불행한 남자잖아요.”

서울에는 엄청나게 많은 CCTV가 있다. 하루에 몇 번 카메라에 찍히는지 알기 어려울 정도다. 그런데 김 회장도 실종자도 지난 한 달간 집 근처 도로는 물론이고 지하철역 CCTV에도 찍힌 적이 없었다. 혹시 집 안에 있는 건 아닐까? 오래전 젊은 부부가 실종된 사건이 있었다.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은 엘리베이터 CCTV에 찍혀 있으나 나온 흔적이 없었다. 세간의 이목을 끈 사건이었으나 여전히 미제사건으로 남아있다. 기용은 이 사건도 미제로 남는 건 아닐까 하는 불길한 마음이 들었다.

기용과 이석은 압수수색 영장을 받아서 김 회장 아파트로 갔다. 관리인 입회하에 현관문을 따고 안으로 들어갔다. 전망 좋은 거실 가운데 흰색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 있고, 천장과 벽은 흡음 자재로 시공되어 있었다. 대형 스피커와 고급스러워 보이는 오디오 세트와 LP판과 CD들. 가죽 소파에 편안히 누워서 사랑하는 아내가 연주하는 피아노 소나타를 듣고 싶다는 마음이 저절로 솟아오를 만큼 완벽한 공간이었다. 안방으로 들어갔다. 침대 반대편 벽면이 거울이라 훨씬 넓어 보였다. 나머지 벽은 두 번째 아내였던 피아니스트의 연주회 사진으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수많은 사진 속 여자 모습에서 기용은 집착의 냄새를 맡았다. 드레스 룸에는 연주용 드레스와 정장이 가득 걸려 있었다. 핸드백, 시계, 팔찌 같은 장신구도 셀 수 없이 많았다.

“김 회장은 딸들은 별로 안 좋아했나 봐요. 와이프 사진과 물건들만 있잖아요.”

“그러네. 아무리 딸들이 미국에 있다지만 좀 심하네.”

“잠깐만요. 선배, 저 머리띠. 진짜 다이아몬드 같아요. 실종자 아바타 머리띠도 저거였죠?”

“맞아. 저 분홍색 핸드백도 아바타가 들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 게 진짠지… 아, 정말 헷갈린다.”

이석이 휴대폰을 꺼내 촬영을 시작했다.

“다른 메타버스 플랫폼도 뒤져봐야 할 거 같아요. 연주회장도 짓고 집도 짓고 컨벤션 센터도 짓는, 말하자면 무엇이든 건축할 수 있는 플랫폼이 있거든요. 요즘은 공연도 메타버스에서 하잖아요. 거기 가면 뭔가 건질 수 있지 않을까요? 김 회장이 집에 파이프오르간을 설치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문득 떠올랐어요.”

기용은 형사 노릇도 이제 못 해 먹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하니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존재하지도 않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범죄라…. 메타버스는 N번 방 사건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새로운 개념이었다. 물리적 한계 없이 무한히 확장되는 디지털 공간에서 천지를 창조한 신처럼 누군가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있다. 신이 창조한 세상은 모두에게 주어졌지만, 인간이 만든 세상은 원하는 자에게만 주어진다. 가상현실을 선택한 사람들은 누구의 지배를 받을까? 그들은 행복할까? 두려움과 무력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소주 한잔이 간절했다.

이석의 말대로 프로젝트매니저라는 닉네임을 가진 아바타가 공연장을 짓고 있었다. 달팽이를 닮은 외관이 미적으로 아름다웠고, 6,000개 이상의 파이프와 4단짜리 건반이 있는 파이프오르간이 설치되어 있었다. 아무리 가상세계라지만 이만한 규모의 공연장을 지으려면 엄청난 돈과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프로젝트매니저가 바로 실종자였다. 기용과 이석은 바이올리니스트를 다시 만나러 갔다. 그녀의 도움이 필요했다. 김 회장은 왜 파이프오르간에 집착하는가. 실종된 여대생이 메타버스에서 거대한 공연장을 짓고 있다는 말을 들은 바이올리니스트는 무언가 생각해내려고 애쓰는 듯 골몰한 표정을 지었다. 한동안 말이 없던 그녀가 입을 뗐다.

“오래전 김 회장이 이런 말을 했어요. 웅장한 파이프오르간이 있는 공연장을 지어서 아내가 바흐의 전곡을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서 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어요. 진짜 바흐를 좋아하는구나, 생각했을 뿐. 꿈꿀 자유는 누구에게나 있으니까요.”

“꿈이라기보다는 과대망상증 환자 같은데요? 개인이 그런 공연장을 지을 수도 없겠지만 짓는다고 해도 모든 곡을 한 사람이 연주할 수는 없잖아요.”

“그렇죠. 그만큼 김 회장이 바흐에게 빠져 있었다는 뜻이죠.”

“왜 꼭 바흐여야 하나요?”

“그는 바흐의 곡이 감동을 주는 이유가 형식이나 구성 때문이 아니라 곡에 담긴 세계관, 즉 종교성 때문이라고 했어요.”

“신앙심이 깊었나 봐요?”

기용이 물었다.

“신앙생활은 하지 않았어요. 바흐의 음악이 신앙이었을 걸요. 몰입해서 복종하고픈 게 인간의 속성 아닐까요? 수많은 종류의 마니아가 있잖아요. 그는 바이올린곡은 별로 안 좋아했어요. 낭만파의 음악은 심약해서 싫다면서. 내 연주회에 와서 그랬다니까요. 내 기분 같은 건 배려하지 않고 경멸하듯…. 짜증을 유발하는 재수 없는 사람이기도 했어요.”

“애처가라면서 왜 아내 친구의 마음은 살피지 않았을까요?”

“지난 며칠간 생각해 보니 모든 걸 자신이 주관해야 만족하는 그런 사람이었던 거 같아요. 어쩌다 함께 식사를 하면요, 아내에게 엄청 자상하게 이것저것 물어요. 샐러드는? 드레싱은? 와인은? 디저트는? 그런데 결국은 자기 마음대로 시키죠.”

“그건 상대를 배려하는 게 아니라 무시하는 거잖아요?”

이석이 물었다.

“음, 무시까지는 아니고, 아내에게 최상의 것을 제공한다? 그런 거겠죠. 부럽기도 했고요. 내게는 정나미 떨어지게 말했지만, 아내한테는 정말 다정했거든요. 저런 남자를 만나야 팔자가 편한 건데, 생각했어요.”

기용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이석이 또 끼어들었다.

“확실히 세대 차이가 나네요. 우리 세대 여자들은 그런 거 싫어해요. 스스로 선택하려고 하지.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건 자유 의지 때문이 아닌가요? 신의 뜻조차 거부할 수 있는.” 

“그런데요. 김 회장이 없어진 게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요? 기다리다 보면 나타날지도 모르잖아요. 왜 형사님들이 찾아다녀요?”

“음대 여학생이 실종되었는데, 김회장이 여대생의 아바타에게 수천만 원어치나 되는 선물을 했더라고요. 그 여대생이 메타버스에서 공연장도 짓고 있고요. 탐문을 하다 여기까지 온 겁니다.”

“아바타에게요? 실제 사람에게가 아니라?”

“그게 뭐냐 하면요. 지방시나 불가리 같은 명품이 가상세계에도 있거든요.”

바이올리니스트는 이석의 설명을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들었다.

“바쁘게 살다 보니 세상과 동떨어진 사람이 되었네요. 그런데 여대생 전공이 뭔데요?”

“파이프오르간이예요.”

“헉, 정말요? 아….”

“왜요? 뭐 짚이는 게 있나요?”

“예전에 미국 집에 설치했다던 파이프오르간요. 그걸 한국으로 실어 왔다고 했거든요. 아내도 죽었는데 왜 가지고 왔나 싶었어요. 두 번째 아내는 피아니스트니까 쓸 일이 없었을 거고. 그래도 가지고 왔다면 어딘가에 설치하지 않았을까요?”

“파이프오르간에 집착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바흐가 바로크 시대 사람이잖아요. 그 당시 음악의 주 소비자는 교회였고 파이프오르간으로 연주를 했으니까요.”

“진짜 어딘가에 설치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건 모르겠어요. 김 회장 소유 부동산을 조사해 보면 나오지 않을까요?”

“이미 조사했어요. 그런데 별장 같은 건 없던데요.”

“어쩐지 있을 거 같아요.”

“파이프오르간이 있는 곳에 두 사람이 같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인가요? 김 회장이 여대생을 납치라도 했다는 건가요?”

“그건 아니지만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드네요. 메타버스인지 하는 곳에 공연장을 짓고 파이프오르간을 설치했다고 하니….”

여대생을 찾지 못한 가운데 신고자(실종자의 지도 교수)가 주관하는 음악회가 열렸다. 기용은 혹시 실종자가 오지 않을까 마음을 졸이며 기다렸다. 영화에서 보았듯 여대생이 헐레벌떡 달려와서 무대에 설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도 없다. 파이프오르간 소리를 현장에서 듣는 건 처음이었다. 웅장하고 경건하다는 말에는 공감했으나 천상에 오르는 느낌까지는 들지 않았다. 기대와 달리 앙콜 곡이 끝날 때까지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니? 제발 어딘가에 작은 흔적이라도 남겨 줘. 기용은 만난 적 없는 아가씨에게 자신의 염원이 가 닿기를 빌었다. 로비에서 김 회장의 여자 동창을 만났다. 그녀도 실종자가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다고 했다.

“김 회장이 가엽고 안타깝다고 여겼는데 아닐 수도 있을 거 같아요.”

“아닐 수도 있다니? 무슨 말씀이신지?”

“형사님을 만난 뒤로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요. 여자들이 자살한 것 같아요.”

“네?”

“순전히 제 생각이라 말하기는 뭐 하지만…. 첫 여자 말인데요. 그때 임신 중이었대요. 여자는 낙태하려고 했고요, 김 회장은 낳아야 한다며 크게 싸웠다고 했어요. 김 회장이 그 일을 오래오래 자책했는데 나는 그때 김 회장 편을 들었거든요. 나쁜 여자라고 욕까지 하면서요. 지금 생각하니 남편이 모든 걸 결정하는 게 싫었는지도 모르겠다 싶어요. 자신의 몸에 대한 선택권이라도 가지려고 한 거 아닐까요?”

기용은 며칠 전 이석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상대를 배려하는 게 아니라 무시하는 거라는…. 로봇처럼 복종만 하는 생활이 전혀 행복하지 않았을 거라는.

“시신이 머리가 없더래요. 팔도 하나 없고, 몸도 다 으깨지고. 의사나 경찰도 그렇게 처참한 시신은 본 적이 없다고 했대요. 사고로 결론이 났지만, 일부러 트레일러 뒤를 들이받은 건 아니었을까요?”

“흠.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속도가 시속 180Km였대요. 시급한 일이 아니라면 딱지 뗄 염려를 하면서 그렇게 달리지는 않잖아요. 늘 지기만 했던 남자를 이기는 방법은 자신이 죽는 것뿐이라고 생각한 거 아닐까요?”

“두 번째 아내는 왜요?”

“사별한 지 2년 만에 15살이나 어린 여자를 데리고 와서 깜짝 놀랐어요. 너무 빨리 재혼해서 놀랐고, 첫 아내와 닮아서 놀랐어요. 이목구비 하나하나를 뜯어보면 다른 사람인데 분위기는 완전 닮았더라고요. 하얀 피부하며 낭창낭창한 몸매하며. 그녀가 전처 사진을 보았다면 싫었을 거 같아요. 닮았기 때문에 선택되었다고 생각하면 끔찍하고, 속상하고, 기분 나쁘고 그러지 않았을까요?”

“그럼 이 사진 한번 봐주실래요?”

기용은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는 실종자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어머, 많이 닮았네요. 첫 여자하고. 서글서글하게 큰 눈도 그렇고.”

“둘이 같이 있을 확률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세요?”

“지금 제 직감으로는 백 퍼센트.”

“집에 가니 다이아몬드 머리띠가 있더군요. 비슷한 머리띠를 실종자에게 선물했더라고요. 아, 참. 실종자가 아니라 실종자의 아바타에게요. 무슨 말인지 모르시겠죠?”

기용은 메타버스와 아바타와 음악당과 파이프오르간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둘째 부인의 물건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는데 아바타가 착용한 머리띠와 핸드백이 아파트에 있더라는 사실도.

“뉴스에서 메타버스라는 말은 들어 보았어요. 사물인터넷이니 증강현실이니 인공지능이니 하는 단어들과 함께요.”

기용의 휴대폰이 울렸다. 이석이었다.

“선배님, 공연장이 있는 플랫폼 업체에서 연락이 왔는데요. 김 회장과 실종자가 맺은 계약서가 있대요.”

“계약서? 무슨 계약서?”

“김 회장이 자신만을 위해 연주하는 조건으로 공연장을 증여한다는. 가상세계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뭐? 현실에서도?”

“네, 현실의 공연장도 함께라고 적혀 있대요.”

폰 밖으로 간간이 흘러나오는 말을 듣고 있던 김 회장의 여자 동창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급해요. 파이프오르간 설치할 만한 김 회장의 저택이 어디 있는지 아세요? 미국 집에 설치했던 걸 한국으로 가지고 왔답니다.”

“여자가 죽었을 때 처분한 줄 알았죠. 정말 한국으로 가지고 왔다면 어딘가에 설치했을 텐데. 진짜 한국에 가지고 왔다면…, 아무나 설치할 수 없으니 그쪽으로 알아보면 되지 않을까요? 나는 전혀 몰랐어요. 섭섭하네요. 마음이 허하다, 쓸쓸하다, 괴롭다, 할 때마다 내가 얼마나 많이 위로해 주었는데 내게 일언반구도 없었다고 생각하니 괘씸하기까지 해요.”

“정말 서운하시겠습니다. 설치 업자를 찾아보라고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큰 도움을 주신 겁니다.”

기용은 혼란스러웠다. 메타버스 속 계약서라니. 두 사람은 가상세계에서 맺은 계약을 현실에서도 지키려고 했던 걸까. 그 계약서도 법적 효력이 있을까.

파이프오르간 이전을 전문으로 하는 업체를 찾아냈다. 사장은 오래전 일이지만 주택에 설치한 경우가 딱 한 번뿐이어서 기억난다고 했다. 사장이 알려 준 주소지를 검색했다. 용문산 기슭에 있는 집이었다. 스카이뷰를 열었다. 울창한 숲속을 흐르는 시냇물과 다리와 저택과 정원이 보였다. 등기부등본을 열람했다. 대지가 3,000평이나 되는 큰 집이었다. 첫 번째 아내가 죽은 지 1년 뒤에 현 소유주 앞으로 등기가 넘어간 상태였다. 

저택 소유주는 뉴질랜드에 사는 은퇴한 목사였다. 그는 돈을 받고 명의만 빌려주었을 뿐인데 국세청이라면 몰라도 경찰에서 왜 전화했는지 궁금해했다. 기용과 이석은 용문산 계곡으로 달려갔다. 구불구불한 길을 한참 올라가자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폭이 제법 넓고 수량도 풍부한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차 한 대가 지나다닐 정도의 좁은 다리 너머 솟을대문이 보였다. 철제 대문과 높은 담장에 둘러싸인 저택에 접근할 방법이 없었다. 길을 따라 위쪽으로 계속 올라갔다. 막다른 곳에 차를 세우고 내려다보았지만, 아름드리 큰 나무들 때문에 보이는 게 없었다.

밤이 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사람이 산다면 틀림없이 불빛이 비칠 테니까. 서울에서 얼마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휴대폰이 안 터지다니 이게 말이 되느냐며 이석이 툴툴거렸다. 기용은 저택에 전화나 인터넷이 설치되었는지 확인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너는 내려가서 어느 통신사에서 전화선과 인터넷 선 가설했는지 알아봐. 그거부터 확인했어야 하는데.”

“선배님은요?”

“나는 여기 있을게. 전화번호 나오면 전화해 봐. 누가 받을지도 모르잖아. 먹을 것 좀 사서 다시 올라와. 아무래도 잠복해야 할 거 같아.”

“함께 내려가세요. 다시 오면 되잖아요.”

“잠깐이라도 자리를 비우면 꼭 머피의 법칙이 작용하더라고.”

“네, 최대한 빨리 올라올게요.”

이석이 차를 몰고 산 아래로 내려간 뒤에 기용은 편하게 감시할 자리를 찾아보았다. 큰 나무 아래 사람 하나가 누우면 딱 알맞을 만한 바위가 있었다. 바위 위에 올라가서 벌러덩 누웠다. 나뭇잎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였다. 바람이 불 때마다 가지와 잎들이 몸을 떨었다.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풍경이 어쩐지 서글펐다. 왜 사는지…. 오늘 밤도 긴 밤이 될 것 같았다. 웅성대는 소리에 기용은 눈을 떴다. 깜박 잠이든 모양이었다. 자세히 보니 이석이 가운데 있고, 서너 명의 남자가 이석을 둘러싸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뭐야?”

“아, 팀장님이 바로 치고 들어가라고 하셔서요. 이 동네 기동타격대와 함께 왔어요.”

“일 크게 벌이는 거 아냐? 뒷감당은 어찌하려고?”

“팀장님이 책임진다고 하셨어요. 살인 사건 되면 큰일 난다면서.”

남자들 사이에 작업복을 입은 남자가 있었다. 한 달에 두 번 저택의 정원을 돌봐주는 동네 사람이라고 했다. 그가 말없이 열쇠로 대문을 열었다. 마당에 들어서니 오르간 소리가 들렸다. 많이 들어 본 듯한 음률이었다. 현관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문을 열자 푸른색 벽면에 늘어선 은색 파이프가 보였다. 마치 우주를 보는 것 같았다. 아바타와 꼭 같이 차려입은 아가씨가 하늘과 별을 담은 멜로디를 풀어내고 있었다. 기용은 숨이 막혔다.

연주가 끝나자 2층 난간에서 박수 소리가 울렸다. 턱시도를 차려입은 김 회장이 브라보를 연발했다. 현관문이 열린 사실도 여러 사람이 서 있는 모습도 보이지 않는 듯했다. 이석이 아가씨에게 달려갔다.

“괜찮아요? 경찰입니다. 당신을 구하러 왔습니다.”

“구하다뇨.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납치당한 거 아닌가요?”

“뭔가 잘못 아신 것 같아요. 나는 자유 의지로 여기 있는 거예요.” 

“지도 교수님이 실종신고를 했어요.”

“아, 부잣집 애들한테만 레슨을 길게 해 주는 그 꼰대? 내게는 30분 이상 시간을 내준 적이 없어요. 돈지랄을 하는 건지 음악을 하는 건지. 재능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학교에 안 간 거예요.”

“여기서는 진정한 음악을 한다는 말인가요?”

“그래요. 저분이 내 염원을 들어 주셨어요. 모든 지원을 하겠다는 계약서에 사인도 했어요.”

“메타버스에서 한 계약? 저 남자가 강요했죠? 그렇죠?”

이석이 다그치듯 물었다.

“아뇨, 내가 원했어요. 계약에 따라 내가 이 모든 걸 가진 거라고요. 이 집도 파이프오르간도. 메타버스 공연장도. 내가 프로젝트매니저예요. 이제 곧 내가 지은 공연장에서 연주할 거예요. 나는 스승이며, 제자이고, 연주자예요. 공연장 설계자이며 건설자이기도 하죠. 저분은 신과 같아요. 무슨 소원이든 들어주는.”

“아가씨와 선생님 저희와 함께 가 주셔야겠습니다. 조사할 게 있습니다.”

기용이 말했다.

“메타버스에서 한 계약이 문제라는 건가요? 나는 법적인 성인인데 무슨 문제가 있다는 건가요? 지금 여기서 종이에 사인하면 되나요?”

아가씨가 앙칼진 목소리로 물었다.

“저분이 오르가니스트, 피아니스트 아내를 두었던 건 아시나요? 그녀들은 모두 죽었어요. 아가씨가 오르가니스트가 아니었다면, 바이올린이나 플루트나 다른 악기를 전공했으면 결코 선택하지 않았을 거예요. 자신의 욕망을 위해 여자를 수집하는 거라고요.”

이석이 소리쳤다.

“사람은 모두 죽어요. 루저가 되어 사는 것보다 하고 싶은 것 다 해 보고 죽는 게 나은 거 아닌가요? 나는 지금 너무 행복해요.”

말문이 막힌 이석이 멍한 얼굴로 아가씨를 쳐다보았다. 

“도대체 무슨 죄목으로 나를 데려가서 조사한다는 겁니까?”

김 회장이 계단을 내려오며 말했다.

“저 아가씨가 자신의 자유 의지로 여기 있는 거라고 하지 않습니까? 나는 아내들을 위해 최선을 다했고 지금도 최선을 다하는 중입니다. 법을 어긴 적도 없어요. 음악을 사랑하듯 그녀들을 사랑할 뿐이예요.”

“당신은 늘 여자들을 조종했어. 저 아가씨에게도 그렇게 하겠지.”

“조종? 그녀의 얼굴을 봐. 천상의 행복을 누리는 것 같지 않아? 바흐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엄청난 파이프오르간을 그녀 손으로 만들었어. 그녀는 바흐를 뛰어넘는 연주자가 될 거고, 나는 신처럼 위대한 창조자가 될 거야.”

김 회장이 두 손을 높이 들고 웃기 시작했다. 그의 웃음소리는 은색 파이프와 푸른색 벽을 넘어 머나먼 우주까지 퍼질 기세였다. (작가포럼 2023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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