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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내누 Oct 12. 2022

놀이터에서 힘을 얻는 방법들

우리들의 해방일지: 남편 111일째

10월 12일 수요일 맑음


요즘 평일에 우리 가족의 일상은 굉장히 규칙적인 루틴이 잡혀가기 시작했다. 이제 둘째가 밤잠을 길게 자고 낮에도 비교적 규칙적인 패턴이 정착되면서 불확실성이 사라진 덕분이다. 첫째도 가장 안 좋았던 시기를 벗어나 조금씩 다시 원래의 사랑스럽고 의젓한 아들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다. 적어도 유치원에서 데려가라고 전화가 올 것 같은 불안에 시달리지는 않아도 될 것 같다.


사실 지난주까지는 날씨가 외출을 안 하기엔 너무 아까운 좋은 가을날이라 평일 낮에 첫째가 유치원 등원을 하면 잠깐이라도 어디론가 다녀오려고 노력을 했다. 대신 둘째를 데리고 하는 외출이니 준비 시간도 그렇고 어디를 다니건 몇 배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그만큼 피로도도 높아서 나갔다 들어오면 아내와 나도 모두 지쳐서 소파에 주저앉기 일쑤였다. 사실 어딜 나갔다 오면 더 힘든 건 아마도 아기인 둘째다. 그래서 이번 주부터는 한껏 날씨가 추워지기도 했으니 모두가 힘든 외출을 매일 하는 건 자제하기로 했다.


어쨌든 그래서 나는 오늘 첫째 하원 시간 전까지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오전에는 둘째랑 늘어지게 아침 낮잠을 1시간도 넘게 잤고, 오후에는 책을 읽거나 유튜브 편집 진도를 나갔다. 아내는 오늘 운전 연수를 받고 왔는데 나는 집에만 계속 있었다 보니 첫째 하원을 내가 시키겠다고 했다. 원래 어제도 내가 나갔으니까 아내가 나갈 차례긴 했는데, 다행히 첫째가 나를 보고 왜 번갈아가면서 나오지 않았냐고 뭐라 하진 않았다.


어제는 날씨가 쌀쌀해서 아이들이 별로 없고 금세 들어갔는데, 오늘은 날씨가 조금 푸근해져서 굉장히 놀이터가 북적였다. 아무래도 몇 주만 지나면 추워서 놀이터에도 찬바람이 쌩쌩 불게 될 테니 그전까지 열심히 놀이터를 즐겨야 한다는 생각을 다들 하는 것 같다. 이렇게 놀이터에 나와 있으면 여러모로 힘을 얻을 수 있다.


우선 가장 좋은 건 우리 아이만 유별나거나 이상하지 않다는 확신이 든다는 점이다. 며칠 전까지 아내와도 심각하게 첫째가 ADHD인지에 대해 고민을 했었지만, 놀이터에 나와서 보면 솔직히 다른 애들도 다 비슷비슷하다. 물론 다 똑같지는 않고 애들마다 약간씩 분명 다르기는 하지만 잘 지켜보면 다 각자의 문제들이 있다. 모든 게 완벽하고 문제가 하나도 없는 애는 사실 없다. 애들 10명이 있다고 치고 여러 가지 능력과 특성의 평균치를 대충 생각한다면 다들 어떤 점은 평균 이상이고 어떤 점은 평균 이하다. 집에서 내 아이만 매일 본다면 얘가 뭘 좀 잘하면 천재인가 싶을 것이고, 좀 못난이 짓을 하면 나만 매운맛 문제아가 당첨되었나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놀이터에서 남의 애들을 보고 있자면 그런 착각이 싹 없어진다.


또 놀이터에서는 다른 아이 부모들과 동병상련을 느낄 수 있다. 애들이 다 어딘가 부모를 힘들게 한다는 것은 결국 육아의 고통을 공감하는 사람들과의 연대가 쉽게 생길 수 있다는 뜻이다. 나도 힘들고 너도 힘들고 우리 모두 힘들구나. 위아 더 월드! 그리고 그 와중에도 상대적으로 위안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은 우리 집이 육아 여건이 현재 가장 괜찮다는 것이다. 일단 우리처럼 엄마 아빠가 둘 다 육아휴직을 하는 집은 없다. 대부분은 엄마가 아이를 돌보고 아빠는 일을 하거나, 혹은 둘 다 일을 하고 조부모의 도움을 받는다. 물론 내년 초만 지나면 우리도 비슷한 상황이 되겠지만 이런 시기가 있는 것만으로도 다들 우리를 부러워한다.


그리고 놀이터에 나가면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어서 좋다. 하루 종일 집에서 말도 못 하는 100일 아기랑 있어서 심심하다가도 놀이터에 가면 아무나 붙잡고 말을 걸어도 대화가 된다. 5살인 첫째랑도 말이 통하고 얘 친구들도 와서 말을 걸어주고 아들 친구 엄마든 아빠든 할머니든 수다 떨 상대가 넘쳐난다. 놀이터에선 보통 애들끼리 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보호자들은 좀 편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고 정보 교환을 하기에도 좋다. 아이랑 둘이 있을 때보다 죄책감 없이 핸드폰을 하거나 책을 볼 수도 있다.


이런 것들이 아니라도 그냥 놀이터가 시끌벅적하면 좋은 것 같다. 영화 <칠드런 오브 맨>에서는 아이들이 태어나지 않아 인류가 멸종 위기에 사회를 비유적으로 '놀이터에 소음이 사라지자 절망이 찾아왔다'라고 표현했다. 물론 놀이터엔 웃음만 있지는 않다. 거기엔 떼쓰는 애도 있고 우는 애도 있고 싸우는 애도 있고 동시다발적으로 문제가 발생하지만 그래도 아무도 없는 놀이터보다는 낫다. 사람 살만한 동네에 사는 것 같아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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