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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려 Jul 11. 2024

나는 내 슬픔이 지겹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 '이제는 지겹다'라고 말하는 것은 참혹한 짓이다."


신형철 님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19쪽이다.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다가 이 문장에 다시 발이 걸렸다.


"당신의 고통이 나를 불편하게 한다는 말은 얼마나 잔인한가. 우리가 그렇게 잔인하다." - 같은 책 43쪽

앞 뒤 문장을 읽고 읽다가 필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내 속의 돌멩이를 꺼냈다.

"타인의 고통은 원래 불편한 거 아냐? 난 내 고통으로도 버거운데?"

그렇게 난 잔인하다.


나는 내 슬픔이 지겹다. 살아온 세월만큼 썩혔으니 장맛비에 씻겨 내려갔으면 좋을 텐데. 아니면 무의식의 밑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으면 콘크리트라도 부어버릴 텐데. 오히려 50여 년 동안 체화된 슬픔은 무기력과 두통을 넘어서 무감각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일상을 엎어버린 빈자리에 앉아 오로지 자신만을 바라보라고 한다.


물론 한동안 구석에 박혀있던 분노가 슬픔과 고통이란 이름으로 휘몰아치기 시작한 계기가 있다. (계기가 아닌 변명일지도...) 지난 20여 년 동안 얼굴을 보지 않고 일 년에 두세 번 안부만 묻던 아버지가 아프다. 새언니한테서 이미 경고를 들은 상태였다. 아버지가 아프고 그걸 핑계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화를 해댄다고 했다. 그동안의 일들 때문에 아들 둘도 아버지를 찾지 않은지 오래고. 자기는 괜찮다면 방실방실 웃으며 시아버지 일을 처리했던 막내며느리도 아버지 전화를 차단했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난 이유를 묻지 않았다. 막내며느리를 배려해서가 아니라, 아버지를 더욱 미워하게 될까 두려워서다. 

아들들에게만 전화를 돌리던 아버지가 나에게 전화를 했다. 둘 다 전화를 받지 않아서이기도 하겠지만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 깨졌다는 징표다. 아버지가 그렇게 아픈 걸까, 그럼 난 어떻게 해야 하지? 생각이 도돌이질을 해대다 과호흡이 오고 발작이 왔다. 온몸의 세포가 퇴화하여 기억이 있던 최초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때처럼 아프고 그때처럼 슬프고 화가 난다.


겨우 달래고 잠재웠던 어린 시절의 내가 표면으로 드러났다. 지금의 나는 '그건 과거일 뿐이라고. 더 이상 그 사람은 나도 오빠도 동생도 엄마도 해칠 수 없다'라고 소리를 질러냈지만 소용이 없다. 온몸이 아프고 눈물이 흐르고 흐르고...  이런 내가 지겹다. 

나와 비슷한 상황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고 물었다. 

"난 이렇게 떠들어 대는데 너는 어떻게 한 마디도 안 해? 도대체 어떻게 버티냐고?"

듣기만 하던 친구가 입을 뗐다.

"너는 감정을 헤아려야 하는 사람이고 나는 외면해야 하는 사람이야. 물론 외면한다고 해결이 되지는 않아. 근데 난 그래야 버틸 수 있어."

외면. 그래! 까짓것 모른 척해버리자.

책을 펼쳤지만 낱자가 들어오지 않았다. 마무리 교정을 봐서 응모해야 하는 원고가 있지만 글에 검댕이 칠을 하고 있었다. 티브이를 보고 영화를 찾아보며 깔깔거렸지만 그다음에 찾아오는 감정은 이름조차 지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다. 김연수 님의 <음악소설집> 속 주인공처럼 '숨을 잊어야 숨을 쉴 수 있었다.( 이 소설을 제대로 읽어보진 못했다. 이 구절만이 떠오른다.)'

그래, 난 감정을 헤아리고 세어야 하는 사람인가 보다. 모든 고통을 고스란히 보고 그래서 아픈가 보다, 깨달아야 하는 사람인가 보다. 그래야 버틸 수 있는 사람인가 보다. 그런 내가 지겹다.


신형철 작가는 말한다. 

"평생 동안 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슬픔에 대한 공부일 것이다."  - 같은 책 19쪽.


가소롭게도 나는 내 슬픔을 공부하려 한다. 손발에 왜 자꾸 쥐가 오는지. 눈물은 왜 시도 때도 없이 흐르는지. 고통에 몸부림치는 어린 나를 어떻게 달래주어야 하는지. 

그 지긋지긋한 슬픔을, 분노를 마주 보려 한다. 컴퓨터를 켜고 자판을 두드리면서 공부하려 한다. 

어느 날 나에게 조금은 덜 잔인해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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