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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려 Oct 05. 2024

모스크바의 유령

제3부 2장 1958년 모스크바


  교실 밖으로 나오자 조선말이 들려왔다. 북조선 학생들이 계단 근처에 모여 있었다. 조금씩 다른 사투리가 섞여 있었지만 서로 뜻이 통하는 말, 북조선 학생들의 말소리를 들으며 선희는 마을 한복판에서 뛰어놀던 때로 잠시나마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선희를 의식한 북조선 학생들이 언제나처럼 목소리를 낮추고 뿔뿔이 흩어졌다.     

  

  레닌그라드의 기숙학교가 다시 생각났다. 지난 10년 동안 선희는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서 그리고 동시에 그곳에 남아 있기 위해서 온 힘을 다 했다. 선희의 태도나 성적에서 부진한 면을 찾지 못한 교장은 대놓고 한숨을 쉬거나 짜증을 부렸다. 교장은 대놓고 선희를 유령으로 만들었고 유령처럼 선희를 지켜보았다.

  학교를 찾아온 손님들만이 선희에게 눈길을 주었다. 선희와 마주쳤을 때 그들은 '카레이스키?' 하며 웃음을 지었다. 그러면 교장은 손님의 귀에 손을 대고 주위 사람들이 모두 들을 수 있을 만큼 큰소리로 말했다.

  “마스터, 빠취리자.”

  그 말과 동시에 손님들의 호기심 가득했던 눈빛은 공포로 바뀌었다. 그리고 손님들은 흉한 것이라도 본 것처럼 선희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등을 돌렸다.

  벗어나고 싶었다. 마스터라는 족쇄, 그리고 양녀라는 단어, 빠취리자.  

   

  그들과 외모가 다르기 때문일 거라는 마지막 위안은 대학에 와서 무너졌다. 중국인들과는 다른 분위기의 동양 학생들이 보였고 그들이 북조선 학생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북조선 학생들 중 한 여학생은 북조선 학생들뿐만이 아니라 소련 학생들이나 교수들과도 잘 어울렸다. 그녀의 이름이 김 은영이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나타나면 모두들 은영아, 은영 킴 하고 부르며 다가갔다.

  선희는 몸을 움츠리고 북조선 학생들 말에, 특히 김 은영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은영의 목소리는 아버지를 떠올리게 했다. 김 은영이 눈을 반짝이며 웃을 때면 멀리 숨어서 보는 선희에게도 밝은 기운이 전해졌다. 김 은영은 빛이었고 선희는 그림자조차 존재하지 않는 어둠이었다. 온몸에 묻은 어둠을 털어버리고 그들에게 다가가고 싶었다. 하지만 북조선 학생들도 다른 모스크바 대학 사람들처럼 선희를 피했다.


 “벌 받는 거야. 아픈 아버지를 버리고 온 벌.”

  선희는 속에서 멋대로 떠들어 대는 소리를 내버려 두었다. 마스터의 하늘은 생각보다 넓었다. 레닌그라드에서처럼 선희의 손발에는 족쇄가 달려 있었다. 몸에는 낙인이 찍혀 있었다. 아무도 선희에게 다가오지 않았고 선희는 아무에게도 다가설 수 없었다. 사람들은 선희가 다가가면 귀신을 본 듯 놀라며 돌아섰다. 제발 가라, 하며 얼굴을 찡그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선희는 그들에게 유령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되는 자. 나는 유령이야.”     

  고개를 들어 모스크바 대학 본관 건물에 서 있는 첨탑을 바라봤다. 그 끝에는 무게가 12톤이나 나간다는 별이 놓여 있었다. 하늘을 향해 몸부림치지만 하늘에 닿지 못하고 별이라고 불리지만 빛나지 못하는 별.

  “네가 나와 다른 것이 무엇이냐?”

  첨탑 꼭대기에 갇힌 별이 선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소나기에 촉촉이 젖어든 보도블록을 따라 걸었다. 바람결에 대학 볼쇼이 정원에 가득 핀 라일락향기가 날아왔다. 선희는 꽃향기를 따라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바즈데예프 교수의 과제가 생각났다. 

  ‘고향? 나에게 고향이란 것이 있을까? 아버지가 계신 알마티?’

  유럽을 향해 서 있다는 로모노소프 동상처럼 저 어딘가 알마티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서남쪽을 향해 돌아섰다.     


  알마티의 고려인들은 그 누구도 알마티를 자신의 고향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곳은 단지 유배지, 언젠가는 벗어나야 할 곳이었다. 고려인들은 집을 짓고 아이를 낳고 땅을 일궈 농사를 지으면서도 그곳을 고향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알마티에서 태어난 아이들에게도 그곳은 단지 몸이 태어난 곳일 뿐이었다. 떠나야 할 곳에서 태어난 그들은 가보지도 못한 고향을 그리워해야 했다. 그것을 부모에 대한 도리로, 자신의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갔다.

  ‘아버지 고향이 황해도라고 했던가? 어머니 고향은 경성? 지금은 서울이라고 불린다고 했던가?’ 

  지금은 북조선과 남조선으로 갈라져버렸다는 그곳을 선희는 알지 못했다. 알마티의 다른 아이들처럼 선희는 고향을 몰랐지만 아버지, 어머니처럼 고향이 그리웠다. 

 

  기침이 심해질수록 말 수가 줄어들던 아버지가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눈물을 감추던 밤이 생각났다. ‘아버지는 잘 지내고 계실까? 한 장뿐인 어머니 사진을 나에게 주시고 아버지는 그 긴 밤을 어떻게 보내실까?’

  아버지 말씀대로 살아 있다는 소식을 편지에 담아 보냈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최 선생님에게 읽어달라고 하시기가 부끄러울까, 답장을 써달라고 하시기 민망한 것일까?’ 선희는 최 선생에게도 편지를 썼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 소식도 받을 수 없었다. 먼 하늘 끝자락을 붙잡고 선희는 안부 인사를 전했다.

  “답장 같은 거 안 보내셔도 돼요. 무사하시기만 하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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