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3장 1958년 모스크바
바즈데예프 교수가 학생들의 과제물을 안고 강의실로 들어왔다.
“자, 세르게이.”
바즈데예프가 과제 하나를 집어 들어 읽었다.
“내 고향은 모스크바. 여러분이 보시는 대로….”
두 문장을 읽고 바즈데예프가 이건 아니라는 표정을 지으며 세르게이를 쳐다봤다. 학생들이 웃었고 세르게이가 일어나 과장되게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했다. 바즈데예프가 미소를 지으며 다시 과제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조선희.”
학생들이 웃음을 거뒀다. 몇몇은 선희를 힐끗거렸고 몇몇은 바즈데예프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가보지 못한 고향’, 정말 좋았어요.”
바즈데예프 교수가 선희에게 따뜻한 미소를 건네며 말했다.
“나와서 읽어주겠어요?”
처음에 선희는 학생들의 눈길이 무서워 과제에서 눈조차 떼지 못했다. 천천히 떨리는 목소리로 글을 읽어 나갔다. 바즈데예프 교수가 따스한 눈빛으로 선희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태어난 곳은 내 고향이 아니다. 흔들리는 기차 안, 그곳에서 어머니는 나를 낳고 돌아가셨다... ” 반쯤 읽었을 때에야 선희는 고개를 들고 학생들을 쳐다봤다. 턱을 괴고 선희를 쳐다보는 학생들도 있었고 바른 자세로 앉아 선희에게 미소 짓고 있는 학생들도 있었다. 모두의 눈망울이 촉촉이 젖어 들어 있었다. 언제나 산만하고 불안해 보이던 세르게이조차 가만히 앉아 선희의 낭독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어느 순간, 선희는 학생들의 눈빛을 모으듯 학생들 하나하나와 눈을 마주치며 글을 읽어내려갔다. 조금 더 길게 쓸 걸, 하는 유치한 생각까지 피어올랐다. 마지막 단락을 읽었을 때 학생 중 몇몇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선희가 읽기를 마치자 학생들은 진심을 담아 박수를 쳤다. 선희는 벅차오르는 가슴과 눈물을 숨기며 맨 뒤에 있는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바즈데예프 교수의 감상평이 간략하게 이어지는 동안 선희의 얼굴은 점점 붉게 달아올랐다. 이어지는 학생들의 감상평들도 선희의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 금발 머리를 곱게 빗어 내린 율리아는 선희에게 가보지 못한 고향으로 꼭 돌아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여름 하늘이 상쾌했다. 저 멀리서 몰려오는 먹구름조차 이 순간을 빛내기 위해 달려오는 것 같았다. 돌려받은 과제를 가슴에 안고 선희는 로모노소프 동상 앞에 섰다.
“아버지 저 오늘 칭찬받았어요.”
사람들 앞에서 발표라는 것을 처음 해봤다. 누군가와 눈을 보며 이야기를 나눈 것은 11년 만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어둠 속에 가두려고만 든다고 생각했다.
'그 속에 갇혀 허우적대기만 했을 뿐, 어둠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뛰어 오른 적이 있었던가? 어쩌면 그들 탓이 아니었을지도 몰라. 카레이스키, 마스터, 빠취리자라는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고 그 속에 나를 가둬버린 것은 바로 나 자신이 아니었을까? 수많은 사람들 중 누군가는 내밀었을 손을 외면한 건, 아니 볼 수 없었던 것은 나의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선희는 자신이 보려 하지 않았고 듣지 않으려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선희는 몸을 돌려 스탈린의 지시로 만들어졌다는 본관 건물로 향했다. 적진 한가운데로 쳐들어 가 반 토막을 내 듯 본관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돌아서서 첨탑 꼭대기의 빛나지 못하는 별을 바라봤다.
“난 너랑 달라, 난 살아 있어. 난 유령이 아니야.”
선희는 별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양 옆으로 볼쇼이 정원을 거느리고 있는 길고 네모난 연못을 따라 걸었다. 연못처럼 긴 직사각형의 광장이 나타났다. 학생들이 풀밭에 앉아 모스크바의 여름을 즐기고 있었다.
1년 전 이곳에 앉아 있다가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이 무거워 엉덩이를 털고 일어난 뒤로 처음이었다. 선희는 나쁜 기억을 털어버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래, 저기까지만 가면 또 다른 길이 있을 거야. 길이 없다면…?’
만들어가고 싶었다. 선희는 마스터의 성을 향해 언덕을 오르던 그때처럼 주먹을 꼭 쥐었다.
모스크바 대학을 벗어나 큰길을 건너자 끈끈한 덫에서 발을 떼어내는 것 같았다. 선희는 지나온 길을 돌아봤다. 스탈린의 빛나지 못하는 별이 아득히 검은 점 하나로 찍혀 있었다.
레닌 언덕(지금의 바라비요프 언덕)에 오르자 모스크바 시내가 한눈에 담겼다. 가지 말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사람들 시선이 무서워 갇혀 지냈다. 가슴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제대로 웃지도 못했다. 선희는 초라한 자신을 바람결에 날려 보냈다.
가로등이 일제히 켜졌다. 모스크바 시내가 하늘 끝까지 반짝거렸다. 선희는 저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숨 쉬고 걷고 말하고 싶었다. 저 하늘 끝 너머로 나아가고 싶었다. 아버지에게 돌아가 아버지의 손을 잡고 가보지 못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날 밤, 선희는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괜찮은 척 잘 지내고 있어요, 하던 예전의 편지가 아니었다. 고향에 대한 과제 이야기며 바즈데예프 교수의 따스한 웃음과 강의를 같이 듣는 학생들의 이야기를 적어내려 갔다. 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다고, 나중에 함께 아버지의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적었다.
선희가 그날의 풍경을 편지에 담는 동안, 모스크바의 가로등불 위로 먹구름이 제 몸을 키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