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5장 1958년 모스크바
레닌 언덕의 가로등 불빛이 바람에 일렁거렸다. 어디선가 날아온 꽃향기가 사람들 사이를 맴돌았다. 모스크바의 여름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레닌 언덕을 가득 채웠다. 젊은 연인들은 서로의 눈에 빠져 있었고 짝을 짓지 못한 청춘들은 분주하게 눈을 굴렸다. 산책을 하던 중년 부부들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자신들의 추억을 떠올렸다.
선희만이 구석에 홀로 앉아 있었다. 선희 주위는 짙은 어둠으로 꽃향기도 사람들의 웃음소리도 다가오지 못한 채 흩어져 버렸다. 모스크바 시가지의 불빛이 선희의 텅 빈 눈동자 위에서 부서졌다. 깊어가는 여름과 달리 선희의 마음은 차갑게 식어갔다. 선희는 무심하게 눈을 껌벅이다 옆에 놓인 프라우다 지를 보았다.
소련의 당 주간지 프라우다. 얼음 같은 비웃음이 선희의 얼굴에 퍼졌다. 심하게 구겨지고 반쯤 찢어진 ‘프라우다’가 바람에 나풀거렸다. ‘프라우다, 진실이라고?’ 얼굴에 퍼지던 비웃음이 선희의 눈동자까지 파고들었다.
“널 걱정해서 하는 말인데…, 사실은 말이야.”
기숙학교 교장은 선희를 괴롭힐 일이 생기면 그렇게 말하며 다가왔다. 어린 선희는 두려움을 숨기기 위해 두 손을 움켜쥐어야 했다. 학생들의 존재를 팔아 자신의 욕구를 채우려 들던 여자. 선희를 망가뜨릴 수만 있다면 어떤 진실도 팔아버렸을…, 괴물. 선희는 그런 교장의 장난감이었다.
그 만만한 장난감이 모스크바 대학에 합격했을 때 부들부들 떨던 모습이 생각났다. 본색을 숨기며 축하한다고 말하던 교장의 더러운…, 푸른 눈동자가 떠올랐다.
지금의 자신을 본다면 교장은 고소하다며 깔깔거리면서 말할 것이다.
“그러게, 내가 뭐랬어. 선희야. 너는 그래봤자…, 유령이야.”
프라우다 지에는 바즈데예프 교수의 글이 이번 주 칼럼으로 실려 있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조선인 정책에 대한 제언."
제목을 다시 읽으며 선희는 중얼거렸다.
"자신의 잘못은 보지 못하고 남의 잘못만 손가락질하는 글이야."
선희의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흐흐,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글을 쓰는 사람의 행동이 글과 일치하지 않을 때가 많다는 사실이 오히려 선희의 조여 있던 숨통을 풀어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선희는 알고 있었다. 프라우다 지의 글 절반 이상이 거짓이고 당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아부하는 글이지만 바즈데예프의 글은, 바즈데예프의 말은 옳다는 것을…. 바즈데예프가 중국에 빗대어 소련의 고려인 정책을 비판하고 있다는 것을. 바즈데예프는 자신이 쓰는 글처럼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선희는 알고 있었다.
단지 그 속에 선희가 없을 뿐이다. 선희는 눈을 감았다.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입술을 깨물었다.
“다 그러고 살아, 너 혼자 힘들게 살 필요 없어. 너를 무시하는 인간들, 철저히 밟아버려. 너에겐 그럴 힘이 있잖아.”
누군가가 속삭이는 것 같았다. 눈을 뜨고 프라우다를 노려보는 선희의 두 눈에 교장의 더러운 눈동자가 덧씌워졌다.
“그런 비열한 인간은 내 맘대로 할 수 있어. 내 손에서…,”
선희는 떨리는 두 주먹을 들어 천천히 펼쳤다.
“거기에 마스터가 준 권력을 조금만 얹기만 하면 돼. 마스터 그리고 빠취리자! 그 역겨운 단어들을 힘으로 만들어버려.”
선희는 노트를 펴고 펜을 쥐었다. 학교 신문에 투고할 글을 적어 내려갔다. 바즈데예프가 수업시간에 했던 책임감 있고 강한 말들을, 학생들을 걱정하며 다독였던 말들을…, 정치적으로 의심스럽다고, 학생들을 선동하려 든다고 틀어버렸다. 바즈데예프가 얼마나 무책임하고 무능력한지, 학생들을 어떻게 비하했는지. 자신에게 쏟아졌던 야유와 무관심을 모두 바즈데예프의 탓으로 돌리며 자신을 넘어서 모든 학생들이 피해자인 것처럼 글을 써 내려갔다. 문장 한 줄로, 어미 하나로 상황을 조작해 나갔다.
모든 분노를 담아 글을 쓰는 동안 가슴은 심하게 두근거렸고 타들어가던 아픔은 점점 부풀어 오르더니 어느 순간 터져버렸다. 선희는 고름처럼 흘러내리는 고통 속에서 짜릿한 희열을 느끼기 시작했다. 손에서 온몸으로 퍼져 가는 끈끈한 고름 같은 희열. 선희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바라보았다.
“뭘 그 정도 가지고 떠니? 이제 시작이야. 거짓을 프라우다, 진실로 만들어 버려.”
고통과 희열이 번갈아가며 웃어댔다. 그렇게 써내려 간 글의 마지막 문장에서 선희는 다시 한번 망설였다. 손안에 땀이 가득 고였다. 땀이 피처럼 끈적거렸다.
“이것이 마지막 망설임이야. 그들보다 강해지겠어. 그들의 머리 위에 서서 맘껏 비웃어줄 거야.”
선희가 다시 펜을 움켜쥐고 마침표를 찍으려 할 때였다.
“남의 인생에 그렇게 함부로 마침표를 찍어서야 쓰나?”
어느새 왔는지 한 남자가 선희 옆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조심해야 한답니다.”
남자가 선희를 보며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