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6장 1958년 모스크바
북조선 학생들과는 다른 말투였다. 하지만 조선어였다.
‘남조선 사람인가? 여기에 남조선 사람이 있을 리 없는데?’
선희가 남자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남자의 맑은 눈이 가로등 불빛에 흔들거렸다.
전쟁이 터졌고 남과 북으로 갈라졌다. 레닌그라드 기숙학교에서 간간이 들리던 조선의 소식은 언제나 어두웠다.
전쟁 통에 죽었어야 할 카레이스키가 왜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교장의 속삭임 아닌 속삭임이 한동안 선희의 주위를 맴돌았다. 몇몇 선생들은 선희를 보며 교장과 같이 웃었고 몇몇 선생은 고개를 숙인 채, 교장과 선희를 모두 외면했다. 그래, 소피아! 선희를 따뜻하게 바라봐 주던 유일한 선생. 소피아만이 선희를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하지만 소피아는 선희를 찾아왔던 그날 밤 이후 사라졌다.
알마티 보다 더 먼 곳, 선희에겐 이 세상의 끝인 남조선이 불쑥 앞에 나타나 손을 내밀고 있었다. 어머니도 이런 말투였을까? 튀어 오르는 생각에 마음이 약해졌다. 선희는 이를 깨물며 고개를 돌렸지만 남자의 말소리는 우렁찼다.
“나는 조 선호.”
선희가 남자의 이름에 놀라 남자를 쳐다봤다.
“그쪽은 조 선희.”
선호가 씩 웃었다.
“이름만 봐서는 아무래도 오빠랑 동생 같지만…, 그럴 리는 없을 테고…. 먼 친척뻘 정도는 되는 것 같으니.”
선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리 편하게 동무나 합시다.”
악수하자며 손을 내미는 선호를 노려보며 선희가 일어서려 할 때였다. 은영이 뛰어 오며 선호를 불렀다. 옆에 앉은 선희를 발견한 은영이 잠시 멈칫거렸다. 은영은 선희에게서 눈길을 거두고는 선호만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걸어와 선호 앞에 섰다.
“선호 동무, 한참 찾았습메다.”
“내가 아직 은영 씨랑은 동무가 아닌 것 같은데.”
선호의 말에 은영이 입을 삐쭉거렸다. 이어서 장난기 하나 없는 얼굴로 선호가 선희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내가 여기서 애타게 찾던 동생을 만났어요. 오늘은 내 여동생 선희랑 둘이서 밥을 먹고 싶은데. 미안하지만 오늘 내 환영회는 나 없이 하는 걸로….”
은영이 황당한 얼굴로 선호를 쳐다봤다. 선희는 선호를 노려보고는 일어나 선호와 은영 사이를 빠져나갔다.
선호는 은영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 선희 뒤를 따라오며 소리를 질렀다.
“선희 동무, 나 배고파요. 같이 밥 먹읍시다.”
선희의 뒤통수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산책하던 중년 부부 한 쌍이 선희와 선호를 보며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