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4장 1958년 모스크바
강의실 문이 열렸다. 바즈데예프 대신 조교가 들어왔다. 조교는 ‘오늘은 휴강이다’, 한 마디를 던지고 나가버렸다. 휴강이라고 좋아하는 학생들도 있었고 바즈데예프 교수는 휴강을 한 적이 없는데 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학생들도 있었다. 일주일에 두 번, 바즈데예프의 강의 시간만을 기다리던 선희의 실망감은 컸다.
그리고 다음 시간도 휴강, 그 다음 시간도…. 한 주, 두 주가 지나면서 바즈데예프가 비밀경찰에게 끌려갔다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중국에 포섭되었다고도 했고 미국의 첩보원이었다는 이야기까지 나돌았다.
또 다시 한 주가 흐르고 학생들이 바즈데예프의 부재와 휴강에 익숙해질 때쯤 바즈데예프가 돌아왔다. 학생들 중 대다수가 또 휴강이려니 하며 오지 않았고 교실에는 선희와 서너 명의 학생만이 앉아 있었다. 바즈데예프가 들어오자 학생들은 와, 하며 탄성을 질렀고 선희도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강의실에 들어 선 바즈데예프는 그동안 휴강해서 미안하다는 의례적인 인사를 하고 책을 폈다. 학생들을 쳐다보지도 않았고 더 이상 웃지도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바즈데예프는 조금씩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만의 환한 웃음을 짓지 않았고 더 이상 선희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학생들도 다시 선희를 외면하고 의식적으로 무시했다. 유령, 선희는 다시 그 강의실에서 유령이 되어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한 줄기 햇살은 더 짙은 먹구름에 가려져 버렸다. 작은 희망 하나는 몸을 틀더니 더 큰 절망이 되어 선희를 내리눌렀다.
교재 속의 메이란 팡만이 선희를 쳐다보고 있었다. 흑백 사진 속의 메이란 팡은 어느 여자보다 곱고 우아했다. 중국 최고의 경극 배우 메이란 팡. 남자로 태어나 여자를 연기하다가 어느 여자보다 더 여자가 되어버린 남자. 어머니의 흐릿한 흑백 사진 위로 메이란팡의 얼굴을 옮겨 보았다. 그 얼굴에 다시 선희 자신을 옮겨보았다.
본성이란 것은 무엇일까? 카레이스키로 태어나 마스터의 양녀로 산다는 건 본성을 거스르는 것일까? 무엇이 이토록 선희를 고립시키는 것일까? 메이란 팡이 세상의 호기심을 견뎌내야 한다면 선희는 세상으로부터의 소멸을 견뎌내야 하는 것일까?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선희가 몸부림칠수록 빠취리자라는 단어는 마스터의 푸른 눈동자처럼 날카롭게 선희를 찔러댔다. 선희는 메이란 팡을 보며 중얼거렸다.
“희망이란 것은 처음부터 없었는지 몰라.”
바즈데예프가 농담 한 마디를 했다. 학생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선희는 더 이상 웃을 수 없었다. 선희도 바즈데예프를 쳐다보지 않았다. 바즈데예프는 이제 이 세상 누구보다도 선희를 외롭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수업을 마치면서 바즈데예프가 학생들에게 말했다.
“카자흐스탄 대학에서 학생들이 견학을 오는데…, 도와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알마티에 있는 카자흐스탄 대학. 선희는 놀라 머리를 들었고 학생들을 둘러보던 바즈데예프와 눈이 마주쳤다. 바즈데예프는 순간 눈을 돌렸고 얼굴이 굳어버렸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견학생 중에 혹시 카레이스키가 있지 않을까? 선희의 마음은 어느새 알마티 동네로 뛰어 들어가고 있었다. 학교로 들어가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마야가 환하게 웃으며 선희를 돌아보는 것 같았다. 눈물이 고였다. 11년 전 헤어진 친구들 얼굴을 하나하나 되새겨 보았다. 마을 아이들 중 혹시라도 누가 그 대학에 가지 않았을까? 누구였더라, 공부 잘하고 똑똑한 아이가 있었는데, 혹시 니콜라이가? 마야가?
봉사 시간이 현장 실습 시간에 포함된다는 교수의 말도 들리지 않았고 웅성거리는 학생들도 보이지 않았다. 선희는 손을 들었다. 햇살 한 줄기 붙잡고 싶었다. 바즈데예프가 못 볼까 봐, 지원하는 학생들이 많을까 봐, 선희는 손을 높이 추켜올렸다. 선희 말고 세 명의 학생이 손을 들었다. 세 명의 이름을 차례로 부른 바즈데예프는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손도 들지 않은 세르게이와 율리아를 마지막으로 호명했다. 율리아가 입술을 깨물었고 세르게이가 잠시 선희를 돌아보았다.
“다섯 명은 나를 따라오도록 하세요.”
어디에도 선희는 없었다. 그때까지 손을 들고 있던 선희는 서서히 손을 내리며 바즈데예프를 노려보았다. 수업을 마치고 일어서는 학생들 사이로 사라지는 바즈데예프의 뒷모습을 놓치지 않고 쫓아가며 노려봤다. 학생들이 모두 빠져나간 후에도 선희는 바즈데예프가 사라진 문만을 노려보았다. 눈물조차 말라버린 눈에서는 원망마저 사라지고 증오만이 남아 있었다.
강의실을 나오자 어지러웠다. 증오의 무게가 선희를 내리눌렀다. 복도는 금요일 마지막 수업을 마친 학생들이 주말 약속을 잡느라 시끄러웠다. 북조선 학생들의 말소리도 들려왔다. 하지만 어디에도 선희의 자리는 없었다.
선희는 더 이상 그들 사이에 끼기 위해 노력하지 않기로 했다. 더 이상 그들을, 그리고 자신을 이해하려 애쓰지 않기로 했다. 철저히 강해지기로 했다. 자신을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을 손아귀에 쥐고 뭉개버릴 수 있을 만큼 강해지겠다고, 그래서 모두가 자신을 두려워하게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넌 유령이야.”
마음속 마스터가 선희에게 속삭이다가 웃어댔다. 선희가 휘청거렸다.
“괜찮아요?”
누군가가 선희의 팔을 부축하며 물었다. 조선말이었다. 하지만 분노는 모든 소리를 태워버렸다. 선희는 팔을 뿌리치고 온몸에 힘을 주었다.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학생들 사이를 걸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