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부 8장 1958년 카자흐스탄 알마티
“우리 엄니, 어쩌슬까잉.”
선희가 전주 댁의 말투를 흉내 내며 울고 있는 전주 댁을 안았다.
“길어야 3년이요, 금방 볼 것인디, 울어 싸면.”
“볼 것잉께 울지. 안 그러면 쳐다도 안 봐.”
선희와 전주 댁이 마주 보며 울고 웃었다.
“소식은 계속 전하겠지만 혹시 연락이 닿지 않아도 걱정하지 마시고요. 저 씩씩한 거 아시죠?”
“그라지, 그라지.”
전주 댁이 선희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밥 꼭 챙겨 먹어라.”
전주 댁이 선희의 뒤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알마티 기차역. 네 개의 대리석 기둥이 받치고 있는 건물 위로 네 개의 조각상이 떠나가고 싶은 곳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가방 하나를 들고 이반 뒤를 따라가던 때가 생각났다. 어둠 속에서 어린 선희를 노려보던 조각상들이 뛰어내려와 길을 막을 것 같았는데…. 차라리 그때 떠나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괜히 떠오르는 생각들을 지우며 선희는 역 안으로 들어섰다. 최 선생 가족이 선희를 기다리고 있었다.
최 선생이 선희를 보자 고개를 숙였다. 최 선생 뒤로 남천 댁이 선영을 앞에 세우고 서 있었다.
“선영아, 언니한테 인사해야지.”
남천 댁이 말하자 선영이 남천 댁 뒤로 숨었다. 선희가 선영 앞으로 다가가 한쪽 무릎을 접고 선영을 보았다.
“선영아, 미안했어.”
선희가 선영의 눈을 바라봤다. 선영의 눈 속 깊숙이 선희가 만들어 놓은 두려움이 보였다. 선영을 쪼아대는 어둠을 걷어내며 선희가 말했다.
“네 잘못이 아니란다. 선영아.”
선영이 웃었고 선희가 미소 지었다.
선희가 일어서자 최 선생이 선희에게 편지 꾸러미를 건넸다. 선희가 아버지에게 보냈던 편지들이었다. 선희가 말없이 받아 들고 돌아서려 하자, 남천 댁이 최 선생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말을 재촉했다.
“선희야, 미안하다. 사실은….”
최 선생이 마른침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식당 칸에 자리를 잡은 선희는 차 한 잔을 시켰다. 종업원이 사모바르를 가져와 차를 따라줬다. 선희는 찻잔을 한쪽으로 치우고 편지 꾸러미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꾸러미 맨 위에 선희가 처음 보냈던 편지가 꼬깃꼬깃하고 지저분하게 얼룩진 채 놓여 있었다. 그게 아버지의 손 같고 주름 같아 선희는 한 동안 편지를 쓰다듬었다.
어스름한 저녁, 이반이 선희의 첫 번째 편지를 최 선생에게 가져왔다. 마스터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다며 편지와 함께 돈 봉투를 내려놓았다. 이런 돈 필요 없다며 최 선생이 달려들자, 이반이 최 선생을 뿌리치며 소리 질렀다. 마스터한테 직접 말하라고….
그날 밤, 최 선생은 사람들 눈을 피해 아버지를 찾아갔다. 마을 사람들이 돌아가며 아버지를 돌봐주고는 있었지만 밤늦은 시간이면 아버지는 혼자 누워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최 선생이 주위를 살피며 아버지 방에 들어갔을 때 아버지는 눈조차 뜨지 못했다.
“형님, 선희한테서 편지가 왔소. 그놈의 이바노비치가 거짓말을 한 것이었네.”
아버지의 감은 눈이 떨렸다.
“그러니까 모스크바는 아니지만 레닌그라드에서 좋은 학교에 들어갔다고….”
최 선생이 선희의 편지를 아버지 손에 쥐어줬다. 아버지가 눈을 떴다.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래요, 선희가 살아있대요. 그러니까 형님도 기운 차리고….”
아버지는 가슴에 놓인 선희의 편지를 왼손으로 움켜쥐고는 온 힘을 다해 오른손을 들었다. 최 선생의 눈이 아버지의 손끝을 따라갔다. 나무 상자 위에 어린아이의 주먹처럼 둥글게 구겨진 편지 한 통이 놓여 있었다.
“이 편지를 그때 너에게 보냈어야 하는데, 미안하다.”
최 선생이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남천 댁이 다가와 흰 주머니를 건네며 말했다.
“마스터가 준 돈은 한 푼도 쓰지 않았단다. 어떻게 해야 할 줄 몰라서 그냥…. 선희야, 미안하다. 우리가 용기가 없어서.”
선희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니에요. 제가 오해해서 죄송해요. 이 돈은…, 아줌마가 좋은 데 써주세요.”
기차가 기적 소리를 울리며 속도를 높였다. 차창 밖으로 눈송이들이 날아오르다가 창가에 물방울로 맺혔다. 선희는 누렇게 색이 변한 편지 봉투를 가슴에 안았다. ‘아버지의 편지.’ 봉투 속의 편지를 꺼내는 선희의 손이 심하게 떨렸다.
선희가 떠나던 날, 아버지가 최 선생을 찾아왔다고 했다. 선희에게 편지를 써야 하니까, 글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날 아버지가 불러 준 글을 최 선생이 적어 주었고 아버지는 다시 글을 옮겨 ‘그렸다.’ 선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던 날 아버지는 그 편지를 움켜쥐고 밤새 울었을 것이다.
구겨지고 누렇게 바랜 종이 위에 삐뚤삐뚤 커다란 글씨가 놓여 있었다.
“선희야,
아버지는 잘 있다.
너는 잘 살아라.
아버지 조 상철.”
선희는 편지를 쓰다듬었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이 글을 지울까 봐 선희는 고개를 들었다. 창밖을 보며 이젠 아프지 마시고 어머니와 함께 편히 쉬시라고 인사를 했다. 가방에서 아버지가 준 쇳조각과 어머니의 사진을 꺼내 편지 옆에 올려놓았다. 탁자 한편에서 선호의 만년필이 반짝거렸다.
모스크바에 가면 선호에게 편지를 써야겠다. 차가운 벤치에 앉아 있는 은영에게 다가가, 보지도 않고 펼쳐 놓은 책갈피에 편지를 꽂아야겠다. 선호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해야겠다. 그리고 은영 옆에 앉아 북조선 이야기를 물어야겠다. 아버지 고향, 황해도는 어떤 곳인지, 은영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물어야겠다.
눈부시게 환한 햇살이 비쳐 들어왔다. 밤새 쌓인 눈이 기차 바퀴를 휘감아 돌다가 날아올랐다. 햇살에 부서지는 눈송이들이 꽃처럼 찬란했다.
“카레이스키.”
선희는 카레이스키란 말에 고개를 돌렸다. 기차가 간이역에 들어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