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부 7장 1958년 카자흐스탄 알마티
전주 댁이 마을 입구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선희가 보이자 전주 댁이 뛰어가 선희를 안았다. 선희가 전주 댁 품 안에서 무너져 내렸다.
전주 댁은 흰 밥 한 그릇과 된장국을 내려놓고 선희의 손에 숟가락을 쥐어 주었다. 밥과 된장국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밥을 한 술 입에 넣자 울컥 눈물이 가슴속에서 치밀어 올랐다.
젖 줄기, 선희를 살렸던 하얀 젖 줄기. 어머니를 잃고 처음으로 전주 댁의 젖을 빨았을 때, 아기는 살겠다고 그 하얀 생명줄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다시 생명으로 가득 차올랐다. 지금 하얀 밥의 단물은 선희에게 다시 살라고, 살아도 된다고, 선희의 몸으로 흘러들어 가고 있었다.
“마법을 풀어주는 영원한 사랑의 맹세 같은 건 없어.”
모스크바 강을 따라 흘러가던 선호의 목소리가 생각났다.
“사랑의 맹세 같은 건 필요 없어. 그냥 너로, 나로 살아 있으면 돼.”
그렇게 말했어야 했다. 네 탓이 아니라고 선호에게 말해줬어야 했다.
마스터의 성에 가지 말았어야 했다. 아버지 곁을 떠나지 말았어야 했다. 그리고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어머니 품에 안겨 죽지 말라고 더 큰 소리로, 큰 소리로…, 울었어야 했다.
선희는 젖처럼 자신의 목을 타고 흘러드는 하얀 밥물을 삼키며 선호가, 어머니가 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아내와 딸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안고 홀로 죽어갔을 아버지가, 보고 싶어졌다.
전주 댁은 잠자리에 누워 선희의 손을 꼭 잡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어릴 적에 이렇게 안아줄 것을…. 그 인간이 뭐 무섭다고 그라고 살았는지….”
전주 댁의 남편 덕칠은 작년에 병으로 죽었다고 했다. 각박한 세상에서 살아남겠다고 바둥바둥 대면서 말라가던 덕칠의 얼굴이 생각났다. 자기 자식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어찌 전주 댁 혼자만의 몫이었을까? 선희를 볼 때마다 흔들리던 덕칠의 눈동자가 기억났다. 다가가 아저씨를 안아줬어야 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때 선희는 어렸고 덕칠은 약했다.
마당에 불빛들이 어른거리고 시끄러워졌다. 전주 댁과 선희가 놀라 일어났다. 문을 열어보니 동네 사람들이 뛰어다니고 있다. 전주 댁과 선희도 겉옷을 걸쳐 입고 집밖으로 나갔다. 남자들이 뛰어가고 있었다. 마을 아낙들은 아이들을 안고 서서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똘이 엄마, 무슨 일이랴?”
전주 댁이 옆에 있는 아낙에게 물었다.
“아주마이, 마스터 성에 불이 났으요.”
언덕을 바라보았다. 어둑어둑한 언덕 위로 자그마한 불빛이 일렁이다 사그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우짜슬까잉, 언능 올라가 꺼야 할 것인디.”
“남자들이 가긴 갔는데, 올라가다 다 타버리겄죠.”
언덕을 바라보던 똘이 엄마의 얼굴이 갑자기 환해졌다.
“워메, 우짜슬까잉.”
전주 댁이 소리를 질렀고 여자들이 아이들을 감싸 안았다.
언덕 위로 불길이 터져 올랐다. 성곽의 형태가 잠시 보이는가 싶더니 거대해진 화마가 성을, 아니 성당을 집어삼켰다. 검은 하늘 위로 주홍빛 불꽃이 일렁거렸다. 타오르는 불꽃을 따라 검은 연기도 고개를 들고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세찬 바람에 검은 연기가 맥없이 흩어지더니 하얀 연기가 뭉글뭉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하얀 연기는 언덕을 타고 흘러내리다가 하늘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제 몸을 다 삼켜버린 화마가 주홍색 눈을 끔벅하더니 고통에 몸을 틀었다. 검은 연기 한 줄기가 피어오르다가 입을 크게 벌리고 비명을 지르다가 스러져 갔다. 그 검은 몸짓 뒤편으로 몽글몽글 하얀 연기가 날아올랐다.
마법에서 풀려난 백조들 같았다. 백조들이 검은 사슬에서 벗어나 마지막 날개 짓을 하며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선희의 얼굴에서 두려움이 사라지고 기쁨이 차올랐다. 성당에 있던 수많은 책들은 뻥 뚫린 천장 위로 날아오를 것이다. ‘날아올라라, 날아올라라.’ 선희는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서 그들을 배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