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부 9장 1958년 카자흐스탄 알마티
다시 한번 카레이스키란 소리가 들렸다. 부부처럼 보이는 중년의 남자와 여자가 통로 건너편 탁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남자는 두껍고 결이 고운 모직 코트를 입고 있었다. 머리에 쓴 검은 우샨카 밑으로 노란빛이 드문드문 섞인 윤기 도는 흰 머리카락이 보였다. 여자는 기다란 깃털을 꽂은 검은 쿠반카를 쓰고 어깨에는 검은 단비 숄을 두르고 있었다. 유행이 한참 지난 차림새였지만 세월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톨스토이나 푸시킨의 소설에서 방금 빠져나온 사람들 같았다.
어디서 봤더라? 낯이 익었다. 차분하고 우아해 보이는 분위기와는 달리 부부는 큰 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오히려 선희가 들으라는 듯 목청을 높였다. 둘은 창 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미동도 하지 않고 목소리만 높였다.
“카레이스키, 그들이 여기에 많이 묻혔다면서요.”
아내가 말했다.
“땅이 얼어서 묻지도 못하고 차가운 바닥에 던져졌다더군요.”
남편이 말했다.
“그래도 내 아이가 잘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면, 아니 소식을 모르더라도 잘 살고 있다면 세상 그 어디라도 따뜻할 거예요.”
아내의 목소리가 젖어들었다. 그들의 말을 듣고 있던 선희가 놀라 일어났다. 급히 짐을 챙겨 문 쪽으로 뛰어나갔다.
“선희, 코트 가져가야지.”
뒤에서 여자가 선희를 부르더니 선희의 손에 코트를 쥐어주었다.
“감사합니다, 부인.”
선희가 인사를 하고 뛰어 나갔다. 선희를 바라보고 있던 여자 뒤로 남자가 서며 말했다.
“우리가 고맙구나. 선희야.”
“고맙다, 선희야. 스파시바, 선희.”
여자가 아프고…, 따스한 눈으로 미소 지었다. 부부 사이를 한 남자아이가 파고 들어왔다. 부부가 아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아이의 파란 눈동자가 은색 머릿결과 함께 반짝거렸다.
급하게 뛰어내린 선희 뒤로 텅 빈 식당 칸을 실은 기차가 지나갔다.
역에는 낡은 간이 역사 하나만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역명도 적혀 있지 않았다. 눈을 덮어쓴 역사 지붕 굴뚝에서는 하얀 연기가 피워 오르고 있었다.
반대편으로 눈을 돌렸다. 저 멀리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자작나무 숲이 보였다. 선희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자작나무 숲으로 향했다. 자작나무 숲 사이로 비춰든 햇살이 길고 가는 황금색 길을 눈 위에 만들었다. 그 길을 따라갔다. 자작나무들이 손짓을 하듯 끊임없이 가지를 흔들었다. 숲 사이로 바람 한줄기가 날아들었다. 눈들이 땅에서 솟아오르더니 선희 앞에서 춤을 추다가 내려앉았다. 작은 소용돌이 하나는 빙글빙글 돌다가 선희의 발아래로 내려앉았다.
돌아설까 망설이다가 한 발자국을 더 내디뎠을 때였다. 선희는 눈 속에 박힌 돌을 밟고 미끄러졌다. 자작나무에 간신히 매달려 있던 눈들이 후드득, 쏟아져 내렸다. 쏟아져 내린 눈 사이로 쇠로 만들어진 팻말 하나가 나타났다. 녹이 슬대로 슬어버린 팻말에는 흐릿하게 검은 글씨의 형태가 남아 있었다. 아버지가 주었던 쇳조각이 생각났다. 선희는 넘어지면서 놓쳐버린 가방으로 손을 뻗었다. 선희가 밟고 미끄러졌던 돌이 눈에 들어왔다. 돌 위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쌓인 눈을 치웠다. 삐뚤빼뚤 새겨진 글 한 줄이 나타났다.
1937. 카레이스키들 여기 잠들다
바람에 날아올랐던 눈송이들이 무릎을 꿇고 앉은 선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