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서 당연하다고 누렸던 환경이 당연하지 않을 때.
<삶에서 당연하다고 누렸던 환경이 당연하지 않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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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간 내 글을 모아 하나의 책으로 엮어진 에세이스트가 꿈이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 꿈에 조금씩 다가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되려 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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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생각의 동물이다. 그러니 그 상황을 미연에 예방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어야 했다.
하지만, 영하 -17도의 날씨에서 반지하의 냉골. 7일 근무를 한 뒤 이불을 단번에 걷어내고
밖으로 힘차게 걸음을 옮길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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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지, 분명 소변을 보아도 잘 내려가지 않은 기미가 보였다.
그래서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변기의 하수로 빨려 들어가는 와류와 회오리의 시원함이
무척이나 약하고 힘겨워 보였으나. 3번의 레버질로 단단한 똥덩어리가 흘러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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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당연히 다음 똥덩어리도 쉬이 넘어갈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일어날 일은 결국 일어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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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3분 결국, 어제 먹었던 중국산 땅콩의 역습으로 화장실 변기는 사망하셨다.
레버를 당기면, 당길수록 여름 저수지의 수문이 점점 차오르 듯,
짜장면 국물에 물을 희석시킨 듯한 탁한 물들이 점점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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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하 -12도의 날씨 모처럼 쉬는 날 이불 밖은 위험하다는 것을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먹다 남은 짜장면에 물을 부어놓은 것 같은 화장실 변기의 상황을 보고 있자니,
이불 밖이 더 안전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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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을 B202호.
이 새끼는 허구한 날 무슨 게임을 하는 것인지,
신음소리와 욕지거리를 내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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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시발새끼"
"어어어어 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악!"
"안돼 안돼 안돼"
"어어어 윽으ㅡ으으윽 헉헉헉 아아아악"
"아놔, 좆같네"
“어어어어, 어억어거어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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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키보드를 쌔게 내려치는 소리도 들렸다.
그럴 때면 나는 분노를 삭이며, 기도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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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머리 위에 타오을 숯을 쌓아 올려놓으라 말하는 신이시여."
"복수 또한 신의 영역임을 알고 있습니다."
"부디, 제 마음에 평온을 주시옵고,
그로 인해 잠을 못 자는 이 시간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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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음이 되지 않는 것을 욕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저 녀석의 몰입감 쩌는 게임을 욕해야 하는 것인지.
게임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나는 B202호가 무슨 게임을 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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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 ~ 04:00까지 끊이지 않고 이 세상 혼자 사는 놈처럼.
지껄여 대는 그놈의 목소리 때문에 잠을 설친 적이 하루 이튿날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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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쩌겠는가, 200/20만 원에 행거형 왕자 옷걸이와 냉장고,
전자레인지가 구비되어 있는 집이 어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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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일 침수 피해 지역 세면대, 싱크대 교체 공사가 있습니다.>라는 집주인 여사님의 문자를 받고 알았다.
내가 계약하고 살고 있던 이 방이 몇십 년 만의 폭우로 침수된 방이라는 것을 입주하고 1달이 지난 뒤,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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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다했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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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부동산을 통해 계약을, "이 집은 아닌 것 같은데"라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갈색의 날개 달린 바퀴벌레가
튀어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날개가 있고, 연한 갈색의 바퀴벌레는 일본산이라는 말을 얼핏 들었던 적이 있다.)
하지만, 일반 시급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서울의 집 값과 교통비를 아끼기 위해서는
가격대비 이만한 집은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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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그것은 이 방에서 앞으로 일어날 전조증상을 보여준 것과 같았다.
돈이 없는 나. 당장 친척동생의 집에서 방을 빼야 하는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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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할 수 있는 선택지는 없었다.
내 인생은 4지 선다형 객관식 답안지가 존재하지 않은지 오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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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삿짐을 빼는 기간 하루를 남겨놓은 상황에서 가격과 지리적으로
최적의 조건을 제시한 그 집을 선택하지 않으면, 내 몸 한 곳 누울 곳이 없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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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례함은 언제나 차고 넘치고, 용서의 덕목은 항상 아쉬운 사람에게 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작은 작업실의 화장실 좌변기의 물도 시베리아 한파에 꽁꽁 얼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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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비를 부르고, 그것을 녹이며, 정상 작동까지 시키는 데에 40~45만 원의 기회비용이 들어간다고 한다.
그냥, 히터를 틀고, 뜨거운 물을 부으면 쏟아 오른 자바라의 호수에 다시금 상수도의 물이 콸콸 나올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란다.
(열선을 이용하여 물이 얼어 나오지 않는 곳에 열침을 넣고 계속해서 녹여 나가야 한다나 어쩐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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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20만 원의 반지하 방의 변기 막힌 것도 모자라,
월 60만 원의 작업실 화장실까지 말썽이라니.
이거, 이거 보통이 아니다.
거기에 사면초가 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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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용은 비용대로, 내 똥꼬는 똥꼬대로 똥 쌀 때를 정하여 정해진 곳에서 거사를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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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의 거사는 지하철역 공용화장실에서 거하게 치렀다.
참을 대로 참은 나의 장은 공용화장실의 막혔던 변기를 시원하게 뚫을 기세로,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뿜어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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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놀라운 파괴력이다.
이것을 해낸 내가 자못 대단하게 느껴진 하루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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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도, 지하철의 공용화장실 변기는 내 모든 응가를 받아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레버를 내림과 동시에 시원하고 깨끗한 백색 변기의 위용을 다시 내 비췄다.
변기 물의 색도 청량했다.
(청량하다는 표현을 여기에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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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변기와 작업실 변기가 막혀도 쏟아낼 지하철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는 우리나라 좋은 나라는 국뽕이 쏟아 오르며,
한 결 가벼운 몸으로 작업실로 향하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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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이토록 간사하다.
변 한 번 제대로 시원하게 봤다고 하루가 이렇게 상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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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우리 집 변기의 짜장면 국물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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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상온으로 올라간 뒤 2일 만에 나의 짜장면 국물을 말끔히 내려 보낼 수 있었다.
혐오의 감정이 올라왔다면, 내가 표현을 잘한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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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에 가고 싶어 작업실을 빨리 닫는 경우가 생긴 2022년의 겨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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