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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젤 Dec 25. 2021

[음악] 토끼와 나 / 다린

달콤하게 공허한 위로, 그리고 외로움에 대하여

앨범을 통째로 듣는 것을 좋아한다.


다린, 숲 앨범 커버, 2021. 2.


https://www.youtube.com/watch?v=c1quHooSVgE&t=1647s


세상 모든 슬픔을 물리칠 순 없지만 너만의 내가 되어 너를 지켜줄게
모든 아름다움은 완벽하지 않아 망가지지 않는 사랑 너에게 줄게
이제 어디로든 갈 수 있어 작은 종이배를 타고 푸른 하늘 은하수 너와 마주 앉아서
모든 그림자가 잠드는 끝이라 불리우는 수평선 너머 펼쳐진 저기 꿈의 징검다리로

너를 만났던 그 순간 모든 두려움과 슬픔은 저 멀리 어제로
이제 어디로든 갈 수 있어 작은 종이배를 타고 푸른 하늘 은하수 너와 마주 앉아서
모든 그림자가 잠드는 끝이라 불리우는 수평선 너머 펼쳐진 저기 꿈의 징검다리로


이 곡은 다린의 첫 정규앨범 <숲> 중에서 가장 따뜻하게 달래주는 곡이다. (첫눈에 반했다는 내용의 곡 - Maudie - 이 있으나 첫눈에 반했다는 걸 따뜻하다고 보기는 좀 어려우므로 논외로 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래는 쓸쓸하다. 이렇게 따뜻하게 말하고 있는 때에도. 스러지는 느낌, 너와 나는 두렵고 슬프고 외로운 존재이고, 사랑은 스러지고 망가질 것이라서 달콤하게 공허하고. 그래서 잠시간의 우울에서 벗어나려, 혹은 그렇게 해주겠다고 약속하며, 외롭고 우울한 두 사람이 잠시 기대는 그런 느낌. 기운이 없다고 할까. 요즘 대부분의 인디음악이 그렇기는 하다만서도. 이 글을 쓰다가 떠오른 요즈음의 인디음악에 대한 단상은 여기로: 링크


왜 그렇게 느껴질까? 아무래도 같이 꿈으로 잠으로 끝으로 도망가자는 심상 때문일까.


새소년이나 선우정아, 혁오나 스텔라장의 성장형 감수성을 좋아한다. 같이 잠드는 심상이라도 꿈으로 도피하는 심상보다는, 같이 울고 웃고 깔깔대다가 잠들자는 게 편안하잖아(집에 가자/스텔라장). 꿈으로 가자 보다는 내일로 가자(난춘/새소년)가, 도망가자보다는 도망갔다가 충전해서 다시 씩씩하게 돌아오자(도망가자/선우정아), 와리가리하던 청년이 이제는 I'll save my friend and love ya!(Love ya!/혁오) 하는 용기가 더 아름답잖아.


최근에 외로움에 대해 다각도에서 생각해봤다. 감각으로서의 외로움, 감정으로서의 외로움, 현상으로서의 외로움에 대해. 사실 손발이 얼어있을 때 따뜻한 목욕물에 들어가기만 해도 덜 외로워지는 기분이니까, 감각이 맞을지도. 외로움은 공허한 감각. 정서 건강에 썩 좋지는 않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가지고 있는 것. 외로움을 통해 내가 관계 맺기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주변 사람을 소중히 여길 수 있는 한, 그 안에서 의미 있는 것. 외로움을 느끼지 않으면 인간이라는 존재가 이렇게 서로 돕고 사랑하며 번성하지 않았을 테니, 진화론적 이기적 유전자의 장난이려나.


누구나 가지고 있고 아무도 구해줄 수 없는 자기 연민과 우울을, 각자가 너와 나를 위해 끊임없이 털어내며 떨쳐내지 않으면, 결국은 물귀신처럼 서로의 외로움에 취하고 우울에 빠져들 뿐이다. 관계 속의 내가 외로워질 때면, 나를 외롭게 만드는 상대를 미워하게 될 때가 있다. 관계에서 사랑의 방식과 주파수가 늘 같을 수는 없으므로, 너도 나처럼 때로 외롭다는 사실을 잊은 채. 결국은 스스로 털어내야 한다는 점은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외로움이라는 것이 사실 누가 채워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때로는 아니어도 괜찮다고 위로하고 또 기대면서 서로를 지켜줄 수는 있겠지만.


현재의 상태를 어떻게 정의하냐에 따라 외로움의 크기가 달라진다는 흥미로운 결과가 있기는 하지만 마음먹기에 따라 모두 극복 가능하다면 인류에 고통이 있을 리가 없지. 인간은 SNS 피드 게시물이 바뀌는 것만으로도 우울감이 달라지는 존재다. [1] 타지에서 상황적으로 피할 수 없는 외로운 상태 역시 성격 형성에 영향을 미치게 될 터이다. 정서적 결핍 상태. 그리고 결핍은 파고들면 파고 들 수록 더욱 크게 보이는 것 같다. 구멍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드는 것 마냥. 결국은, '모두 그래, 다른 사람의 결핍을 채워줄 수 있어, 우리는 서로를 채워줄 수 있어' 라고 말해주는 친구와 주변 사람들의 존재가 소중하다는 점을 깨닫는 게 중요한 것은 아닐까.


결핍은 또한 가능성이라는 어느 감독의 말을 떠올려 본다. [2] 애착 문제가 있을 때 가장 유효한 해결책 중 첫째는 안전기지를 만드는 것, 가장 유효한 것은 누군가의 안전기지가 되어 주는 것, 궁극적으로는 나를 사랑하고 나 자신의 안전기지가 되어 주는 것이라고 했는데, 비슷한 맥락이 아니려나. 만고불변의 진리,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너 자신을 사랑하라. 고독의 능력이라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3] 내 세계에 갇힌 외로움이라는 증상에 대한 해결법이, 고독에서 의미를 찾고 나와의 관계에서 평화를 찾는 것이라니.


[1] 페이스북 실험 기사

[2] 걷는 듯 천천히, 고레다 히로카즈, 59p,  "결핍은 결점이 아니다. 가능성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세계는 불완전한 그대로, 불완전하기 때문에 풍요롭다고 여기게 된다."

[3] 외로움의 철학, 라르스 스벤젠, 186p,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문제는 과도한 외로움이 아니라 너무 미미한 고독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고독한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고 너무 빨리 타인을 붙잡아버리면 고독은 위태위태해진다. (중략) 고독의 어려운 점은 자기 자신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점, 자기와의 관계에서 평화를 찾아야 한다는 점이다. 이 평화가 없으면 자기 자신에서 멀어지는 기분 전환을 추구하게 된다."


사회에서 마이너리티로 우울하고 외로운 두 사람이 만나게 되면, 둘 밖에 세상에 없는 '섬 연애'를 하게 되고 그렇게 같이 침몰해간다는 글을 보았던 적이 있다. [4] 그래서 더더욱 'open the closet' 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너만의 내'가 있다는 건 분명 중요하지만, 그것에 서로 묶이게 되면 조금 더 확장된 내면에서 서로를 붙들고 침잠할 뿐이다.


[4] 정신병의 나라에서 왔습니다, 리단, 2021, "'나와 나의 상처나 이질적인 점마저도 공유할 수 있고 나를 그대로 받아들여주고 인정하는 누군가'에 대한 열망을 가진 이들. 이들이 기존의 있던 곳에서 떠나려는 시도를 하고 마침내 성공해 새로운 환경이나 새로운 집단에 속하게 되었을 때, 이 새로운 곳에는 내가 나를 드러내도 될 만한 사람이 있을 거라 믿는다. 오랫동안 외로움에 이끌렸던 사람은 자신처럼 상처를 가진 사람을 알아보고, 쉽게 이끌린다. ...섬 연애는 사회적으로 고립된 자들이 사회적으로 고립됨을 향해 달려가는 것과 같다. " 그 외 '병증의 상호 진화'와 '공의존'에 대하여, 21장 말미.


토끼와 달 / @easel

지속가능성의 측면에서는 더욱 그렇다. 애정의 형태가 우정과 사랑, 소속감, 안정, 따스함, 안정적인 그 무엇이든 내가 지속적으로 나를 잃지 않으면서도 그럴 수 있어야 상대에게도 같은 기대를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은 기대와 관계는 착취에 가깝다. 일방이던 쌍방이던 착취는 오래갈 수 없다.


그러니까, 지속할 수 없는 공허한 위로를 하는 관계보다는 너만의 내가 있기 '때문에' 내가 다른 사람에게 나를 자신 있게 개방하고 또 각자의 세계를 넓혀갈 수 있는 관계가 바람직하겠지.


같이 도망치자는 것보다는, 조금 다쳐 돌아와도 서로가 있으니 괜찮다 [5] 고 해줄 수 있는 그런 관계. 서로의 가족에게, 친구 - 서로를 관계에서 소외시키는 종류의 확장은 논외로 하자- 에게 너와 내가 각자의 방식으로 스며들면서 세계를 넓히는.


가보는 거야 달려도 볼까
어디로든 어떻게든
내가 옆에 있을게 마음껏 울어도 돼
그 다음에

돌아오자 씩씩하게
지쳐도 돼 내가 안아줄게
괜찮아 좀 느려도 천천히 걸어도
나만은 너랑 갈 거야 어디든

도망가자 / 선우정아


그게 벙커나 섬이 아닌, '안전기지'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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