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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젤 Jan 04. 2022

[음악] 난춘(亂春) / 새소년

어지러운 봄, 늦은 위로의 허망함 앞에서

대부분의 청자는 난춘이라는 제목 앞에서 따뜻한(暖) 봄을 떠올렸을 것이다. 난춘이라는 제목은 다분히 중의적이다.


그러나 화자는 봄의 어지러움(亂)을 말한다. 스스로를 잃기 쉬운 계절, 어지러운 봄(亂春)에 대해. 어쩌면 따뜻함과 어지러움은 같이 가는지도 모른다. 아지랑이처럼.


새소년, 난춘(亂春) 앨범 커버, 2020. 5.


 <새소년 난춘 M/V>


그대 나의 작은 심장에 귀 기울일 때에
입을 꼭 맞추어 내 숨을 가져가도 돼요

저무는 아침에 속삭이는 숨
영롱한 달빛에 괴롭히는 꿈
네 눈을 닮은 사랑 그 안에 지는 계절
파도보다 더 거칠게 내리치는
오 그대여 부서지지 마
바람새는 창틀에 넌 추워지지 마
이리 와 나를 꼭 안자
오늘을 살아내고 우리 내일로 가자

내가 너의 작은 심장에 귀 기울일 때에
입을 꼭 맞추어 어제에 도착했습니다

오 그대여 부서지지 마
바람새는 창틀에 넌 추워지지 마
이리 와 나를 꼭 안자
오늘을 살아내고 우리 내일로 가자
그대여 부서지지 마
바람새는 창틀에 넌 추워지지 마
이리 와 나를 꼭 안자
오늘을 살아내고 우리 내일로 가자


그대 나의 작은 심장에 귀 기울일 때에


서로의 작은 심장에 귀를 기울이는 순간은 너와 내가 존재함을 확인하는 그 순간, 서로가 맞닿고 교류하며 소통하는 바로 그 순간일 것이다. 상대방이 살아있음을 확인하면서 안심하는 그 마음은 분명 어떤 종류이건 간에 사랑이 아닐까.


사랑을 좀 너르게 정의해보자.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심을 포함해서. 성경에서 말하는 '원수를 사랑하라'연애감정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보면 세상의 모든 따뜻함이 사랑이다. 귀중하게 여기는 마음,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 아끼는 마음은 물론 어쩐지 조금 불편하게 느껴지는 '동정'도 결국은 자기애에서 확장된 인류애에서 비롯된 사랑인지도. 물론 사랑이 결코 아름답기만 하지는 않다. 상대방의 존재에서 안심한다는 그 마음은 마음을 내어놓는 것. '마음 쓰는 행위'는 어떤 형태이건 간에 나의 어떤 부분을 상대에게 기대도록 한다. 상대가 알아채건, 그렇지 않건. 온기를 넘어선 열기는 사람의 숨을 턱 막히게 하는 재주가 있다. 따뜻함항상 사람을 살리기만 하지는 않으니까. 그래도 사람을 살릴 확률이 높은 것은 차가움보다는 따뜻함이다. 이러나저러나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고 하지 않는가. [1]


[1]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나의 그대에 대한 사랑이, 그대와 나의 사랑이 성애(eros)인지 우정(philia) [2] [3] 인지 박애(agape)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대'가 하고 있는 '네 눈을 닮은 사랑'은 성애에 가까울 것 같다. 눈 안에 계절이 지고 파도보다 더 거칠게 내리치는 사랑은, 불같고 미성숙한 호르몬 탓일 확률이 높으니까. 그대가 하고 있는 사랑이 나와의 사랑이건, 다른 누군가를 향한 사랑이건, 그대는 그 사랑에 괴로워하고 있다. 화자는 그대를 부서지지 말라고 위로하고, 추워지지 말라고 걱정하며, 안아주고 달랜다. 오늘을 살아내고 우리 내일로 가자고.


[2] J. B. Lotz, 사랑의 세 단계, 에로스 필리아 아가페(Die Stufen der Liebe, Eros Philia Agape), Frakfurt, 1971 에서의 분류.

[3] 한편 로츠의 필리아에 대한 견해와는 별개로, 특정 성애나 이상 성애의 기호를 표현할 때 쓰는 것은 eros 가 아니라 philia - pedophila, necrophilia 등 - 인데, 나는 그 차이가 상호 교감 여부 또는 상대방의 반응을 확인할 수 있는지에서 온다고 본다. 그러니까 중심이 나의 욕망(관계성과 그에서 비롯된 욕망의 상호교류)에 있는지 나의 기호(자기중심성과 그에서 비롯된 '나의 선택'에 대한 절대화)에 있는지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유사한 맥락에서, 로츠의 필리아에 대한 해석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가 존재한다. "필리아도 에로스와 마찬가지로 위험과 한계를 지닌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교묘한 양식의 자기 추구’이다. 이는 사랑하는 사람에 비해서 사랑받는 상대방이 지나치게 가볍게 취급될 수 있는 위험을 일컫는다. (중략) 이러한 경향은 최종적으로는 자기우상화에로 귀착된다. 또 하나의 위험은 사랑받는 상대방이 사랑하는 사람보다 지나치게 우월적인 위치를 점하는 경우에서 나타난다. 달리 표현하자면 이는 바로 ‘그릇된 자기 양도’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상대방에게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양도한다. 급기야는 사랑하는 사람을 절대화 혹은 신격화하게 된다." (에로스-필리아-아가페 - 로츠(J.B.Lotz)의 사랑의 세 단계, 권기철(수원가톨릭대학교), 가톨릭철학 제4권, p.176.) 이 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입을 꼭 맞추어 어제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화자의 그대는 내일로 가지 못했다. 내가 너의 심장에 귀 기울여 존재를 확인하는 그 순간, 우리는 '어제'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화자는 어제에 닿아야만, 네가 존재했던 시간이자 네가 살아있던 그 시간에 닿을 수 있다. 화자의 그대에 대한 따뜻함 역시, 그대를 살려내지는 못했다.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과연 그대의 안에 지는 계절과 자연을 화자의 사랑으로 감히 거스를 수 있었을까.


그리하여 내 숨을 가져가도 좋을만한 사랑하는 사람에게 바친 이 노랫말은 흘러나가는 모래처럼 손을 타고 흘러내린다. 상실을 겪고 난 뒤의 늦은 위로는 이렇게나 허망하다. 성인이라면 한 번쯤은 존경하거나 좋아하거나 사랑하는 애정 어린 존재를 죽음으로 잃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생로병사는 피할 수 없는 섭리니까. 가까이는 가족, 조금 뒤에는 친구와 동료. 본인상의 부고가 전해질 때는 슬픔 이전에 허망함이 느껴진다. 사람은 왜 이렇게 상실에 취약할까, 특히 애정 어린 존재와 애정의 상실에. 아무리 건조하게 말하려고 해도 죽음의 상실 앞에서는 막아두었던 둑이 터지듯 감정이 일렁이고 만다. 이것조차 곁에 있는 사람을 아끼도록 해서 인류를 번성시키려는 이기적인 유전자의 장난일까, 토끼와 나에서 말했던 외로움처럼.


晩春, 滿春 그리고 暖春, 亂春 / @easel


따뜻한 봄은 어지럽다. 봄은 따뜻해지면서 꽃을 한 번에 피워낸다. 꽃의 군무가 숨 막히게 아름다워서, 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때론 압도될 때가 있다. 홀린다는 게 이런 걸까 싶게. 피어나고, 더워지고, 수목이 더 빽빽해지고, 열풍을 불게 할, 또 한 차례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게 할 그 에너지가 성큼 가까워지는 것이 실감 나 언뜻 무섭기도 하다. 봄꽃이 만개할 때 꽃은 너무 아름다워서 거기에 있고, 스스로는 거기에 없다. 따뜻한 봄, 늦은 봄, 만개한 봄. 스스로를 잃기 쉬운 계절. [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기 때문에 잊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발을 딛고 지금 여기에 서 있음을. 우리는 내일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오늘을 살아내고 내일로 가자.


[4] 5월. 스프링 피크(Spring Peak)에 대한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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