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앙마이에 머물 수 있는 시간도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하고 싶은 게 있느냐고 물으니 코끼리가 보고 싶고, 파처 협곡을 가고 싶다고 한다. 파처 협곡은 미국의 그랜드캐년과 비슷한 지형으로 유명한 곳인데 시내에서 한 시간 좀 넘게 가야한다. 코끼리를 볼 수 있는 곳도 마찬가지로 거리가 꽤 멀다.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하다 그동안 만난 그랩이나 볼트 기사님 중 연락처를 알아둔 기사님 두 분께 일정을 말하고, 6시간 정도 왕복 운행이 가능한지 총 비용은 얼마인지를 물었다. 한 분은 이틀 뒤 2,000바트를, 한 분은 하루 뒤 1,500바트를 불렀다. 우리는 일정과 금액이 맞는 기사님과 약속을 잡았다. 당연히 빠르고 저렴한 분으로.
아침 일찍 눈을 뜨자마자 아이들과 조식을 먹고 여덟시가 조금 넘은 시각 기사님을 만났다. 먼저 가장 거리가 먼 파처 협곡으로 향했다. 한 시간 남짓 달려가니 매왕 국립공원이 나온다. 인당 입장료와 주차비를 내고 안으로 들어갔다. 가장 유명한 협곡은 제일 끝자락에 있고, 왕복 한 시간이면 충분히 다녀올 수 있는 거리였다. 걸어가는 길은 비교적 평탄하고 잘 닦여 있었다.
건기에 와서 그런지 파처 협곡은 더 건조한 사막 같은 느낌이었다. 지형으로 미루어 짐작해보면 예전에 이곳은 세찬 강줄기가 흐르던 곳인 듯하다. 오랜 세월 강물에 침식되고 퇴적된 지형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제일 안쪽까지 들어가니 가장 웅대한 로마의 기둥과 파처 협곡이 동시에 드러난다. 함께 간 기사님도 우리를 따라 걸어왔는데 전직인지 현직인지 포토그래퍼라고 하시더니, 우리 사진을 너무나 멋지게 여러 장 찍어주셨다. 이렇게 감사할 때가!
찬찬히 아이들과 지형을 살피고 사진을 찍은 뒤 길을 따라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은 협곡 사이 아주 좁은 통로처럼 되어 있었다. 몸집이 좀 큰 분들은 빠져나오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좁은 공간이라 좀 놀랐다. 아이들은 미로 같은지 무척 즐거워하며 내려왔다. 걷다 보니 우리보다 앞서있던 기사님이 자기 휴대폰을 보라고 하시며 또 사진을 찍어주신다. 예상치 못한 서비스에 감사할 뿐이다.
파처 협곡을 다 내려온 뒤에는 오는 길에 보았던 한 호수에 들렀다. Pong Cho라는 이름의 한적한 호수는 키가 큰 나무들과 푸른 잔디밭 너머에 있었는데, 캠핑이 가능한지 여러 텐트가 보였다. 문명과 반짝이는 것들도 좋지만 그냥 자연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있다. 잔잔한 호수와 파릇한 나무들을 보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다시 차에 올라 이번에는 다른 골짜기에 있는 엘리핀팜이라는 곳으로 향했다. 검색하다 알게 된 곳인데 코끼리를 만날 수 있는 정원이자 카페라고 한다. 코끼리 목욕을 시키는 보호구역에 갈까도 생각해봤는데, 첫째는 찬성했지만 둘째는 극구 반대를 했다. 코끼리는 보고 싶지만 너무 많은 접촉을 하는 건 싫다는 것. 그러다 찾은 게 엘리핀팜이었다. 아이들의 성향은 이렇게 다르다.
엘리핀팜은 파처 협곡보다도 더 깊은 산속에 있었다. 한참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가니 코끼리를 만날 수 있으니 주의하라는 표지판이 눈에 띈다. 그 표지판을 지나자마자 거짓말처럼 눈 앞에 코끼리가 나타났다. 거대한 발을 터벅터벅 내딛으며 도로 옆길을 걸어가고 있는 코끼리. 안전장비 하나 없이 코끼리 등에 올라타 한 몸처럼 움직이고 있는 사람까지.
아이들은 길을 걷는 코끼리가 너무나 신기한지 크게 환호성을 지르고 사진을 찍어댔다. 기사님은 천천히 차를 몰며 그런 아이들을 배려해주셨고.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엘리핀팜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코끼리에게 먹이를 주는 곳에는 특히 사람이 빼곡히 모여 있었다.
우선 배가 고프니 끼니를 해결하자며 간단한 볶음밥과 튀김류를 시켜 아이들과 나눠먹었다. 음식과 음료는 많이 비싸지 않았다. 카페 앞쪽으로 계단식 정원이 있는데 그곳 중앙에 꽤 많은 테이블이 있었다. 주문한 음식을 가져와 아이들과 우선 배부터 채웠다. 산중이라 그런지 시내보다 온도가 훨씬 선선하게 느껴졌다. 마른 계곡인 파처 협곡보다도 시원했다.
코끼리 먹이 한 바구니를 사서 먹이 주는 곳으로 가니 이 상황이 너무나 익숙한 코끼리들이 코를 쭈욱 뻗어 먹이를 달라고 성화다. 잔뜩 겁을 먹은 아이들을 달래 겁먹지 말고 먹이를 줘보라고 권한다. 코끝 부분에 닿기만 해도 잽싸게 먹이를 잡아채 입으로 가져가는 코끼리들. 가까이서 보니 코끼리의 눈이 꼭 소의 눈 같다. 끔뻑끔뻑 기다란 속눈썹과 까만 눈동자가 순하고 가엾다.
동물원이나 수족관을 가지 않은지 오래 되었다. 아이들이 동물을 워낙 좋아하는데 많은 대화를 통해 웬만하면 가지 않기로 합의한 때문이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바다를 건너 오면 동물을 보고 싶어한다. 지역별 동물원이나 나이트사파리 같은 특별한 공간을 가보고 싶단다. 그런 공간 대신 더 자연에서 뛰노는 코끼리들을 보고 싶어 왔는데 잘한 짓인지, 가슴 한구석에 죄책감이 싹튼다.
한시간반쯤 그곳에서 시간을 보낸 뒤 숙소로 향했다. 기사님과 약속한 6시간에 거의 딱 맞게 시간을 보냈다. 아이들은 오자마자 수영장 물로 들어가고 남편과 나는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고 아이들의 온갖 물 속 도전(?)을 봐주며 시간을 보냈다. 사실 이날은 치앙마이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 숙소에만 있기 아쉬워 어두워질 무렵 볼트를 불러 시내로 나갔다.
별 생각 없이 핑강 유역으로 갔다가 자연스레 나이트바자쪽으로 걸어가게 되었다. 지난 번에 봤던 선데이마켓이 워낙 커 다른 시장을 더 기대하지 않은 터였다. 그런데 웬걸 나이트바자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 먹을 거리 장터가 서는데, 북적대는 사람들과 열의가 넘치는 가게 주인들로 공간이 들썩였다.
한 명씩 먹고 싶은 걸 말하고 사와서 함께 나눠 먹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종류별 꼬치 구이와 모찌, 내가 좋아하는 팟타이, 남편이 고른 블랙페퍼 소프트쉘 튀김 등. 특히 블랙페퍼 양념에 버무린 튀긴 소프트쉘은 향긋한 후추 향과 적절한 간이 들어가 한 입만 베어 물어도 눈이 동그래지는 맛이었다. 아이들도 너무나 맛있게 잘 먹어서 한 접시를 더 주문해 먹었다. 이 양념이라면 누들이든 밥이든 다른 해산물이든 무엇을 넣고 버무려도 다 맛있을 것만 같다.
그렇게 푸짐하게 밥을 먹고 슬슬 걸어나와 아이언 브릿지로 향했다. 핑강 유역에서 야경을 보기 좋은 곳이라기에 가보았다. 다리의 불빛이 세련된 건 아니었지만 주위의 고급 레스토랑에서 흘러나오는 불빛과 어우러져 꽤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야경 사진을 좀 찍은 뒤에는 아이들의 적극 요청에 따라 툭툭을 탔다. 툭툭은 밤이 진리지, 하며.
치앙마이에 머문 시간 열흘. 그동안 알게 모르게 정이 많이 쌓인 모양이다. 도로도 풍경도 음식도 사람도 어느새 낯익은 도시를 떠나자니 마음이 허하다. 언젠가 다시 치앙마이에 오게 될까. 온다면 그때는 어떤 여행을 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