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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오이 Feb 21. 2022

서글픈 오후

25세 6월

집에 오자마자 신발도 벗지 않고 그대로 현관 앞에 드러누웠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책가방을 베개 삼아 누우면 엄마는 현관 앞이 더럽다며 못 하게 했지만 체육 대회나 학예회 날처럼 기진맥진이 충분한 명목이 되는 날에는 하도록 내버려 두었습니다. 오늘이 딱 그런 날입니다.


꼬박 하루를 소진한 것처럼 기운이 쪽 빠집니다.

단단한 거실 바닥에 녹아들어, 장판과 하나가 될 것 같이 몸뚱이가 무거워질 때쯤, 라디오를 매달고 흥얼거리는 어느 아저씨의 자전거가 지나가고, ‘가전제품 삽니다’ 트럭이 지나갑니다. 밖은 대낮인데 거실에는 벌써 어둠이 내려있습니다. 어제저녁부터 32분에서 33분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있는 거실 시계는 여전히 힘없이 달칵거리고 있습니다. 금방이라도 끊길 것 같더니만 끈질기게도 거실을 울려댑니다.


앞뒤로 열어둔 창으로 맞바람이 칩니다. 커튼이 뜰락 말락 사각거리다가, 잠시 붕 뜨고는 제자리로 내려앉습니다. 뒤늦은 바람이 그제야 내 초라한 귓바퀴를 스쳐갑니다.


아주 예전에 찍은 가족사진이 보입니다. 부모님은 젊고, 2살쯤 된 동생은 아빠 무릎에 앉아 있습니다. 나는 와인색 재킷을 입고 엄마 앞에 서 있습니다. 몇 살에 찍은지도 모르겠는 오래된 사진 속의 나는 아주 해맑아 보입니다. 행복이 뭔지, 슬픔이 뭔지도 잘 모를 것 같아 보일 정도로요. 굳이 저 때의 내가 아니더라도 어제까지의 아니 오늘 아침까지의 나는 적당한 행복과 적당한 슬픔을 맞이하는 적당한 사람이었습니다. 느닷없이 암이란 단어가 나를 수식하니 해맑았던 그 시절의 나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느껴집니다.


느슨한 몸이 점점 더 아래로 깊숙이 박힙니다. 나는 그대로인 모든 것들 틈에서 사그라지고 있습니다. 아침에 다 쏟은 줄 알았던 눈물이 다시금 돕니다.

서글픈 오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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