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마틴 에덴>과 아인슈패너
올해 초 작은 아씨들을 마지막으로 영화관에 가지 않았다. 모두들 조심하는 시기이기도 했고, 딱히 끌리는 영화도 없었다. 그러나 변두리에서 쓰는 인간인 나는 동종 업계 종사들의 이야기에는 늘 호기심이 인다. '마틴 에덴이라고, 사랑을 얻기 위해 펜을 잡은 남자의 이야기라는데?' 소개에 끌릴 수밖에 없었다. 환희와 기쁨, 슬픔과 비통, 변화무쌍한 사랑을 생각하기에 딱 좋은 계절, 하루가 다르게 색을 달리하는 나무와 산과 하늘이 있는 계절에 게다가 글 쓰는 이의 이야기라니. 영화평을 읽어 주는 친구의 마음에 이미 마음은 극장으로 향해 있고, 결국 KF94 마스크를 쓰고 영화관에 가기 이르렀다.
낮에 일하면서 비대면 수업 날 아이의 끼니를 챙겨주다 보면 극장 시간표는 내가 쓸 수 있는 시간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다. 아마도 그래서 더 극장을 잊고 산 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가질 수 없는 거 쳐다도 보지 말지어다. 개봉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영화는 마침 한낮에 가까운 오전, 근처 영화관에서 상영 중이었다. 얼마 만에 가는 극장인가, 게다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관에서의 상영.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9층 영화관에서 (물론 상영관은 이와 무관하지만) 영화 시작을 기다리며 대로를 오가는 차들을 바라보는 것은 나의 즐거움 중 하나였다. 잊고 살았던 사실을 일깨우며 극장에 들어서 커피를 주문했다. 나무 테이블 위에 커피잔을 놓고 앉아 오늘 영화가 나에게 줄 기쁨을 기대했다.
영화 <마틴 에덴>은 잭 런던의 자전적 이야기이자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배경은 이탈리아 나폴리. 새로운 세상으로 깨고 나가는 것의 고통, 비애 그리고 사랑이라는 완벽한 계급 장벽. 판타지에서 벗어나 세상으로 들어간 마틴의 선택은 무엇이었을까. 의지? 신념? 혹은 치기? 맹렬함? 어찌 됐든 그는 자신을 믿었다. 자신이 될 수 있다고 믿었고, 자신의 의지를 믿었다. 확인받을 수 있는 마지막은 그것뿐이었을 것이다. 사랑에서만큼은 절대로 그럴 수 없었으니까. 사랑은 환상이고 그의 이름처럼 에덴, 낙원과도 같은 존재하지 않는 영역의 무엇이었다. 그런 그가 택한 것이 어쩌면 젊은이의 치기였을지라도, 혹은 재능을 가진 자의 광기라고 할지라도 그 모든 게 납득되었다. 한 여인의 산책하는 개가 되고 싶었던 자신의 욕망을 발견하고 스스로 느낀 치욕, 그리고 허무.
사랑이 계급이라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언제나 더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인 세계. 한 층에 나란히 서 있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누군가를 더 사랑한다는 것은 약점이 잡힐 만큼 잡혔다는 뜻이고, 그러니 나는 두 손을 드는 게 맞다. 백기를 들고 투항하듯. '산책하는 개'가 되는 것이 마틴 스스로 가졌던 욕망이었다. 세계가 깨지고 난 뒤 발견하게 된 욕망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는 허무했고, 비통했을 것이다. 그는 자라고 있었으니까. 그의 세계는 팽창하고 있었으니까. 사랑을 벗어난 그의 세계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확장되었다. 그가 내내 주장한 우위를 점하는 유전자의 출연, 그러므로 계급투쟁 자체를 부정했던 것과 자신 사이의 괴리와 모순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는 내내 약자였다. 그는 이길 수 없을 것을 알았다. 태양이 저무는 바다를 향해 힘차게 팔을 저은 것은 그의 마지막 의지였다. 오, 에덴. 그의 천국은 그곳에서, 자신 안에서 이루어졌으리라.
영화를 보고 나와서 아인슈패너가 유명하다는 집에 들렀다. 크림은 숟가락으로 떠서 드세요, 라며 직원은 티스푼을 챙겨주었다. 진한 에스프레소 위에 하얀 생크림이 떠 있었다. 눈 덮인 공원이 컵 안에 담겨 있었다. 첫맛은 달콤하나 섞이지 않아 씁쓸한 중간과 크림이 겉도는 마지막. 전혀 조화롭지 않은 순간이 한 잔에 담긴 커피 같은, 그게 삶이다. 끝까지 찌푸리며 한 입에 털어 넣을지, 혹은 처음의 달콤함을 음미하며 삼킬 것인지, 아니면 내내 그리워만 하다 마지막 한 모금의 에스프레소를 남길 것인지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무엇을 대면하고 무엇을 대면하지 않을 것인지. 그러나 욕망만큼은 대면해야 한다. 마스크를 벗고 직접 들이마셔야 한다, 고 크림이 뒤섞인 갈색의 에스프레소를 입 안에 탈탈 털어 넣으며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