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는 대로 일기
일기를 쓰려고 노트북을 펼쳤다. 괴로운 오늘이다. 그 괴로움의 민낯을 들여다 보고자 앉았다. 나는 왜 괴로운가.
아카데미 노미네이트 영화 <작은 아씨들>을 보고 온 어제부터 기분은 서서히 포물선을 그리며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왜 였을까, 사랑스러운 가족들과 끈끈한 자매애와 더 없는 우정과 행복이 펼쳐지는, 심지어 마지막 장면은 대고모의 유산을 물려받아 그 자리에 학교를 세우고, 자매들은 각자의 재능을 아이들에게 나누며 행복해하는 것이었는데. 조는 책을 썼고, 출판된 책을 가슴에 품는 장면까지.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없는, 그 후로도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동화책 똑 닮은 엔딩까지. 비록 베쓰가 죽었고, 사랑은 엇갈렸지만 작은 아씨들을 보고 자란 지 수십 년이 지난 내가 보기에 그들의 마지막은 완벽했다. 역시 꿈과 희망, 꿈은 이루어진다는 메시지를 강하게 남기는 전형적인 아메리칸 해피 엔딩이었는데 말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꿈은 이루어지고, 꿈이 이루어지는 류의 영화를 좋아하지 않게 됐다. 내 삶이 팍팍할 때는 그런 끝을 좋아했었다. 그러니까 그때는 영화 속으로 도망치고 싶었기 때문에 나는 그런 영화를, 마지막까지 행복하게 마무리되는 영화를 좋아했다. 그렇지만 이제는 또 꼭 그렇지도 않다. 삶을 이루는 것은 반짝이는 순간과 하이킥 하고 싶은 순간과 시궁창에 처 박힌 순간과 무빙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나가는 순간들인데, 그것들이 모두 하나의 점, 하나의 별로 끝나는 것은 아니란 것을 알게 된 후부터 나는 해피 엔딩에 함께 해피해지지 못했다.
어제의 넷. 그들 중 가장 현실적이었던 것은 베쓰의 죽음이었다. 바닷물처럼 서서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베쓰가 남았다. 자연스러운 거라고, 천천히 사라지는 것은 이제 두렵지 않다고 말하던 베쓰 말고는 모두가 sur-real, 현실을 뛰어넘는 사람들이었고, (물론 당연히 그래서 영화지!) 아, 이렇게 강퍅해지고 쓸쓸해진 나만 남았다는 생각에 바닥을 파고 들어가고 있었나 보다.
스무 살 적부터 서른 넘어까지 현실을 모른다고, 너무나 심각한 몽상가라고 나를 힐난하던 이들에게 이 일기를 바친다. 나는 이제 바닥에 본드칠 단단히 해서 대 놓고 행복한 영화를 봐도 마음을 움직이지 못할 만큼 본 투 비 현실러가 되었다. 그러니까 말이야, 누구든 다 때가 있는 법이다. 사랑에 목을 매고 꿈 찾는다고 정신 못 차리는 것처럼 보여도 이렇게 바닥에 단단히, 항구에 묶인 배처럼 정지하게 되는 때도 (당장은 아니더라도, 그리고 당신은 아니더라고) 그 누군가에게는 있는 법. 기다려주자. 비난하지 말지어다.
꼬인 마음은 그래서였다.
역시, 일기를 쓰니 좋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