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산책 May 11. 2022

최선의 확장

여름 문 턱에서

입하였고, 어린이날이었다. 100주년 어린이날이라고, 매일 듣는 라디오인 KBS 클래식 FM에서는 어린이날 특집 선곡으로 동요와 디즈니 컬렉션이 주를 이루었던, 불과 3년 전까지만 해도 어린이날은 나의 조부 기제사여서 휴일 같지 않은 마음은 친정을 가니 마니로 시끄러웠던 날이었는데, 그런 부담이 말끔히 사라진 어린이날.  우리 집 청소년은 어느덧 자라서 아침 일찍 코엑스로 영화를 보러 출타하시고(학교 갈 때 보다 일찍 일어남) 나는 늦잠을 자려다 말고 일어나 아침 일찍 받은 친구 어머님의 소천 소식에 하루 중 문상을 언제 갈까 헤아렸다.


누군가는 태어나고 자라고 사라지는 하루에 이름을 붙이면 또 다른 날이 된다. 어린이날이었고 입하였던 날에 그런 일들이 있었다.



아이가 자라고 그래서 그 아이 몫의 어린이날을 더는 챙기지 않고, 훌쩍 커버린 아이가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고 친구와 코엑스에 가서 영화를 보고 즉석떡볶이를 먹고 메가 커피에 가는 것이 실은 아무렇지 않다. 그게 그렇게 아쉽거나 크는 세월이 아깝거나 하지도 않다. 더 잘해줄 걸 하는 후회를 하지도 않는다. 인생에 있어 어차피 후회는 디폴트이고 최선 역시 디폴트다. 그때 그게 최선이었다.

그 생각을 갖게 된 건 시어머님 장례식장에서였다. 뇌출혈로 쓰러진 어머님을 1년 6개월 동안 요양 병원에 모시는 동안, 나는 그런 걸 알게 되었다. 내가 용을 써도 애를 써도 혹은 싫은 마음을 고쳐 먹고 무엇을 했어도 어쨌거나 이게 최선이었고, 다시 돌아간대도 그것이 최선일 거라는 걸, 외동인 남편과 둘이 상주의 자리에 나란히 서서 생각했다. 더 잘해드릴 걸, 하는 후회를 해봐야 시간을 돌려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 해도 아마 나는 그게 최선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운명이라는 녀석 역시 나에게 1년 6개월의 유예기간을 준 거겠지. 덜 욕먹고 죄책감 좀 덜고 살라고. 아빠의 일 역시, 나는 시시때때로 아빠의 운명을 결정지었던, 그러니까 뇌사에 빠진 아빠의 장기기증을 결정하면서 사망 시각을 정할 수밖에 없었던 2년 전 3월, 화요일을 떠올리며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지만 그 역시 운명이었고 따를 수밖에 없었던 나의 최선이었다고 다독인다.


아이들이 크는 것 역시, 더 잘해줄 수 없다는 걸 안다. 그게 내가 가진 최선이니까.

그러나 한편으로는 나의 최선이라는 한계를 알아서 조금 더 애써보곤 한다.  조금 더 친절하게 말하고, 조금 더 들어주고 조금 더 함께 있어주는 것.

"예술가는 나무처럼 성장해가는 존재입니다. 수액을 재촉하지도 않고 봄 폭풍의 한가운데에 의연하게 서서 혹시 여름이 오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는 일도 없는 나무처럼 말입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여름은 오니까요. 그러나 여름은 마치 자신들 앞에 영원의 시간이 놓여 있는 듯 아무 걱정도 없이 조용히 그리고 여유 있게 기다리는 참을성 있는 사람들에게만 찾아오는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날마다 배우고 있습니다."


 -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라이너 마리아 릴케


얼마 전 책을 읽다가 이걸 스무 살 무렵에 읽었으면 어땠을까 잠시 생각했다. 그러나 금세 어차피 그래 봐야 그때는 알지 못했으리라는 걸 다시금 스스로에게 상기시켰다.  

달리기를 열심히 했던 작년 몇 달 동안 나는 주변에 운동 좀 한다는 이들(남편 포함)이 코어의 힘을 길러야 한다는 둥, 하체 근육을 키워야 한다는 둥의 얘기를 할 때는 '어차피 지금 잘 달리잖아'라며 속으로 뭉개버렸다. 그러다 겨우내 두어 달 쉬고 다시 뛰기 시작했을 때, 무릎이 아파오면서 이런저런 운동을 찾아 하게 됐는데 그러면서 알게 됐다. 복근이 없는(제왕절개로 인한 것이라 믿고 싶다...) 내가 그간 뛸 수 있었던 건 초심자의 행운 같은 것이었구나. 운동이라곤 숨쉬기 말곤 없었던, 그래서 아마도 '주인님, 지금 뛰라고요?' 어리둥절하며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깨닫지 못한 하체의 힘으로 그 몇 달을 기어이 달리고 또 달렸던 것이로구나. 열흘쯤, 하체며 복근 운동을 찾아 하면서 조금은 힘이 생긴(거라 믿고 싶다) 몸이 오늘은 무릎을 견디는 걸 보며 그간 영문도 모르고 애썼을 나의 다리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이다. 이제서 아는 것들이 있다. 때가 되면 알게 되는 것들. 아빠가 그렇게 싫었어도 내가 아빠의 피를 이어받았고, 그 유전자가 나에게 흐르며 지금 누릴 수 있는 어떤 것들이 아빠 덕분이라는 것이나 남편이 엄마를 잃었을 때는 몰랐으나 나 역시 아빠를 잃어보고 나서야 근원을 잃는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길 가는 노인의 뒷모습에 예고 없이 눈시울이 붉어지는 그런 것. 그러나 이 모든 일에 후회를 깃들이지 않는 것은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다는 거다. 아빠를 힘껏 미워했던 것도, 그래서 지우고 싶었던 것도, 남편의 상실을 무심히 바라본 것 역시.


릴케의 편지를 읽으며 삶이란 것을 떠올렸다. 삶을 산다는 것은 나무처럼 자신의 최선을 확장시키는 것이로구나. 그러니 자신의 삶을 사는 이들은 모두 예술가 들일 테고. 후회와 최선 사이에서 선택이 가져오는 결과를 걱정하지 않아도 여름은 온다. 아카시아와 조팝, 이팝나무가 하얗게 하늘을 덮는 파랑 아래 서서 어느덧 살갗으로 닿는 여름의 숨결을 느낀다. 뜨겁고 차가운 햇살과 바람, 초록이 황홀하게 그늘을 만들어 주는 길목에 서서 입하, 라는 말을 읊조린다. 여름에 들어왔다. 여름에는 여름의 최선을 다 하자.

 

가끔, 지난 때를 생각하며 이랬으면 어땠을까 가정해보곤 하지만, 결론은 늘 같다.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나의 최선을 다하면 된다. 영원의 시간이 놓인 듯 그렇게, 무엇도 없는 것처럼.


이전 14화 Da Capo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