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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 Oct 04. 2022

도어락

한바닥 소설집


띠리릭.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거실에 있던 아이가 뛰어 나갔다. 


“아빠다!” 


안방 침대에 누워있던 은희는 팔짱을 끼고 옷장 쪽으로 돌아누웠다.


“아빠,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일하느라 늦었지. 지수, 유치원 잘 갔다왔어?”


거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닫아보려 했지만 좀처럼 꺼지지 않는 신경들이 모두 밖을 향했다. 

나가고 싶다. 

은희는 흰색이 바래 노르스름해진 붙박이 장을 바라보며 지갑 속 지폐 수를 세어봤다. 어제 아이가 외가집에서 받아 온 용돈 이 만원, 그게 지금 은희가 가진 전부다. 지갑 속 몇 장의 카드는 모두 가족 카드라 남편과 은희의 이름으로 되어 있고 결제할 때 마다 남편 휴대폰으로 문자가 날아갔다. 어디 있는지, 뭘 하는지, 하물며 교통 카드로 어딜 찍고 내렸는지까지 다 나오는 카드 외에 은희가 쥔 것은 없었다. 

손발이 잘렸구나, 나는. 

부부싸움을 할 때 마다 은희는 생각했다. 나는 손발이 잘렸다. 

나가고 싶어도 갈 데 가 없었다. 싱글인 친구도 없었지만 생각나는 친구들은 대부분 결혼해서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그나마 친하게 지내는 동네 사람들은 모두 아이의 친구 엄마들이었으므로, 아이들과 남편이 복닥거릴 남의 집에 비집고 들어갈 생각은 할 수도 없었다. 

어딜 가지. 

며칠 전 마사지 기계를 시연한다며 초대한 시은엄마네 집에서 본 중년 여자가 떠올랐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은희는 아이들이 뭘 묻힐까 감히 집어 본 적도 없는 흰색 실크 블라우스에 와인색 펜슬 스커트를 입은 그 여자를 시은엄마는 파트너님이라 불렀다. 파트너님, 우리 파트너님 이라며 서로를 호칭했지만 시은엄마는 마치 그 여자의 비서 같았다. 시은엄마가 파트너님 앞 티코스터 위에 물 잔을 올려 주고 잔이 비었을 때 재빠르게 물을 채우면서 펜을 건네고 화장품 브로셔를 설명하는대로 펼치는 모습을 보며 은희는 시은엄마가 저렇게 빠릿빠릿한 사람이었던가 다시 보게 됐다. 우리 사업을 시작하면, 이라면서 마사지 기계 설명에서 이어지는 제품 설명과 사업 비전을 듣다가 은희는 살짝 졸기도 했는데 파트너님이 웃으며 얘기하는 어느 순간, 은희의 졸음도 사라졌다. 


“남편이랑 싸우고 파리행 티켓을 끊었잖아요. 일주일 머물면서 머리도 식힐겸. 너무 좋더라구요.”


그 파트너님이 말한 ‘너무 좋은’ 것이 은희에게 들어왔다. 경제력. 부부싸움을 하고 어디든 갈 수 있는 경제력에 은희의 귀가 솔깃했다. 


“지수엄마,이거 하고 처음엔 만원 이 만원 찍혔는데, 지금은 시은이 영어학원, 바이올린 학원, 사고력 수학 다 내가 내잖아. 남편한테 이거 저거 말 안하고 내가 하고 싶은대로 교육시키고, 사고 싶은 거 사고 하니까 너무 좋더라. 지금이야 이 정도지만 좀 더 하면 내 노후는 챙길 수 있을 것 같아. 남편도 은근히 이젠 내 통장 잔고 궁금해 한다니까.”


어느 날 부터 통바지에 티셔츠 차림이던 시은엄마의 옷차림이 슬랙스와 셔츠로 바뀌고 은희의 아이와 같은 유치원을 다니는 시은이가 피아노, 바이올린, 수학, 영어 등으로 빼곡하게 일주일을 채워 같이 못 놀게 된 이후, 은희가 먼저 물었었다. 


“시은엄마, 요즘 뭐 배워요?”


파리행 비행기 티켓은 커녕 부산행 기차표도 못 끊는 처지가 되었나, 어쩌다 나는. 

시은엄마가 배우는 건 삶의 기술, 살아가는 능력이었다. 그게 뭐가 됐든, 지금 나는 손발이 잘렸다. 

동네에서 엄마들 끼리 수근거릴 때 은희도 거들었다. 시은엄마가 파는 마사지 기계니 화장품들이 가격 대비 별로 라는 둥, 겉만 화려하지 실상은 마이너스일거라고, 원래 저런 일이 다 그런 거 아니겠느냐며 하는 말들 속에는 그러나 티내지 못하는 부러움이 담겨 있다는 것을 은희는 느꼈다. 시은이가 다니는 학원은 동네를 벗어난 곳에 있었고, 그곳은 은희네 동네 사람들에게는 어떤 상징, 경제력과 정보력을 모두 갖춘 부모들만이 자식을 입성시키는 왕국 같은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일곱살인 시은이는 영어로 문장을 만들어 말하고, 구구단을 외우며, 작은 손으로 바이올린 소품을 연주해 가고 있었다. 

어디서 잘못 끼워진 걸까. 남편과는 연애를 오래 했다. 7년 동안 거의 매일 붙어 다녔다. 대학원생 주제에 대책없이 결혼을 서둘렀을 때 부터였을까. 


이제 우리는 완전한 운명 공동체야, 서로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칠 수 밖에 없지. 


첫 아이를 낳고 남편이 했던 말이었다. 처음 1년은 휴직 하고 아이를 키웠다. 복직한 이후 친정부모님께 한 달에 백만원을 드리면서 아이를 맡겼다. 아이가 세 살 무렵 어린이집에 다니게 된 이후에는 돌봄선생님을 구했다. 돈은 모이지 않았지만 경력은 쌓이니까, 하며 스스로를 위안하고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나 둘째를 낳으면서 은희는 퇴사했다. 그 사이 상황이 바뀌고 도와줄 사람이 없었고, 그쯤 남편 역시 은희에게 퇴사를 권했다. 그때 그냥 버텼어야 했나. 아이 둘을 키우는 삶은 나쁘지 않았다. 보람이 있었고 아픔도 있었지만 기쁨도 있었다. 그러나 그게 다 였다. 오늘 같은 밤, 별 거 아닌 다툼이 은희의 마음을 긁은 날, 갈 곳을 떠올리지 못하는 밤에는 끝없이 뒤를 향해 달리게 되는 밤에는 그것들이 다 무얼까 생각했다. 우리는 화해를 하겠지. 그리고 나는 다시 생활 속으로 들어가겠지. 그리고 나는 또 손발이 잘린 줄도 모르고 허우적대겠지. 바람 쐬러 파리행 티켓을 끊는 중년 여인을 부러워하면서. 

띠리릭, 도어락을 열고 나가고 싶었다. 

아이들이 잠들면, 남편이 거실에서 코를 골면. 

내일 아침은? 애들이 놀라지 않을까? 남편놈이야 놀라든 말든 그건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지만, 일곱살, 세살 아이들.


띠리릭, 도어락을 열면 잘린 손 발이 문 앞에서 은희를 기다리고 있는 상상을 했다. 자, 이제 갈 시간이야. 잊었던 손과 잊혀진 발이 은희의 손목과 발목에 찰싹 붙어서 또각또각 복도를 걷는다. 

교복을 입고 이스트팩을 매고 도날드덕 열쇠고리를 가방에 달랑 거리며 걷는 열 여덟을 지나, 전철역에서 써머리한 노란 노트를 넘기는 스물 둘을 건너 새로 산 구두 속 반창고를 붙인 뒷꿈치가 거슬리는 스물 일곱을 스쳐, 아이의 어린이집 앞에 자동차 비상등을 켜놓고 뛰어 들어가 두 켤레 남은 신발장에서 빨간 운동화를 꺼내 내려놓는 서른 넷, 그리고 서른 여덟.


띠리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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