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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문장은

소설과 이야기 사이

by 산책

- 숱한 도시들 중에 왜 하필이면 파리야? 난 네가 통영이나 부산 쯤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여긴 너무 멀고, 자주 올 수도 없잖아. 그리고 파리는 뭐랄까, 런던이나 뉴욕처럼 갖고 있는 게 넘쳐나서 오히려 시시해. 케이팝 차트 100 같잖아. 너라면 좀 다를 거라 생각했는데.


유람선 위에서 그를 다시 봤을 때 해인은 놀라지 않았다. 있을 줄 알았어. 너는 서울에서 사라진 거지, 이 세계에서 없어진 건 아니었어. 턱수염이 조금 자랐고, 정돈되지 않은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털어버리는 모습, 백팩을 앞으로 매고는 그 위에 기대어 뭔가를 그리는 부지런한 손놀림. 공책과 피사체를 오가는 빠른 눈동자. 해인이 그의 옆에 섰다. 그 역시 드로잉펜에서 손을 떼지 않고 말했다.


- 만나면 반갑다고 할 줄 알았는데 역시 예상했던 반응이야. 오느라 피곤했나보네.

- 옆자리에 앉은 아저씨가 한번도 안 움직이더라고. 엄청 거구였는데. 그래서 꼼짝없이 나도 앉아 있다 왔다고. 사육당하는 기분이었어. 기내식은 왜 이렇게 자주 나오는지.

- 비켜달라고 말도 못했구나? 부산에 있을 걸 그랬나. 거기선 이렇게 날 바로 찾아냈을까? 여기라서 가능한거야. 케이팝 차트 돌리다 보면 아는 노래가 빤하잖아. 여기도 그렇지. 관광객들이 모이는 곳에 항상 있었어, 나는. 네가 올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네 말을 들으니 다음엔 통영이어도 좋겠다 싶네. 남원도 좋고. 몇 년 전에 영화를 봤어. 미드나잇인파리 라고, 너도 알 것 같은데? 자정이 되면 어디선가 검은 자동차가 나타나서 주인공을 태워가잖아. 그럼 벨에포크 시대로 돌아가고. 꿈처럼 반복되는 얘기들, 헤밍웨이 로투렉 같은 이들을 만나면서 주인공이 감탄하지. 역시 파리였어, 주인공이 외치는데 나도 같이 외쳤잖아. 나한테도 그런 장소가 필요했어. 검은 자동차를 만난 건 아니지만, 비슷하게 말야. 여기에서 다시 널 만났잖아. 시간이 움직인 걸까? 뒤로? 앞으로? 나는 어떤 시간으로 떠나고 싶었어. 뒤에 남겨 둔 것 같지만 앞에 남아 있는 시간으로. 파리에 가면 그럴 수 있지 않을까 했지.


그는 그리고 있던 다리 아치를 펜으로 여러번 오갔다. 건넜다 돌아오고 다시 건너는 사람 처럼.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던 걸까.


- 여긴 언제 왔어?

- 여름 쯤? 휴가로 텅텅 빈 동네를 열심히 쏘다녔지.

- 난 처음이야. 어릴 땐 유럽 여행 할 돈도 없었고.


네가 떠나고 가만히 누운 밤에 생각 하나가 산 아래 걸려 있다 불쑥 얼굴을 내민 달처럼 떠올랐다. 너는 분명 어딘가 다른 곳에 있을 테고 그곳을 찾아가야겠다. 해인은 그 말을 하려다 말았다. 말하지 않아도 그는 모든 걸 다 아는 눈치였다.


- 또 누구, 만났어?

- 15층 안경집 아저씨 기억나지? 사진 찍으러 오셨더라. 아저씨는 여기저기 갈 데가 너무 많아서 잠깐 들른 거라고 하시더라고. 물론, 날 처음 마주치고 큰 눈을 잠시 깜박거리시긴 했지만, 이 생활도 나쁘지 않아. 오히려 편해. 라고 하시더라고. 만나고 싶은 사람만 만나면 되니까. 너도 그 중 한 명이었나 보구나, 하곤 금방 가셨어. 왜 우리가 만나야 했는지 깊이 생각 안 해봤네. 아저씨와 나는 왜 여기서 스쳤을까. 고도근시. 어릴 적 부터 엄마가 데리고 갔던 안경집. 스물 다섯 살이었나, 파리에 잠깐 머문 적 있어. 길지 않았어. 살아봤다고 말하기에도 뭐한 시간. 네 계절을 다 보지 못했으니까. 가을 겨울, 두 계절쯤. 뭘 먹고 살아야 하나 고민만 많았는데 도망치고 싶기도 했고. 친구가 잠깐이라도 있다 가라고 하더라. 그때 모아 둔 돈을 다 쓰면 돌아가기로 하고 여기 왔지. 친구가 사는 옥탑 방엔 매일 저녁, 어딘가에서 종소리가 울렸어. 나는 뜨내기였고, 뭔가를 즐기기엔 통장 잔고가 정해져 있고, 종소리가 울리면 아 다시 하루가 지났구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버렸지. 그게 지겹더라고.


자전거가 지나갔고 그가 내 팔을 잡아 끌었다.


- 여기에선 글을 읽을 수 있어. 그리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수도 있고. 신기하지?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는 해인은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 그래, 나는 원래 프랑스어를 못했거든. 자고 일어난 사이 새로운 능력이 생긴 것 같아. 나쁘지 않아. 아니 조금 재밌기도 해. 모든 사람의 말이 들려. 방금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 저 사람 말야. 폴.

- 폴.

- 응, 저 사람이 폴이야. 얼마 전에 아들이 태어났어. 눈이 어찌나 큰 지. 그건 엄마를 닮은 것 같아. 그날, 폴이 저 앞 카페테리아 사람들한테 골든 벨을 울렸어. 드디어 모든 게 완성된 것 같다고. 완성과 동시에 시작이지, 그는 아직 그 앞을 모르고. 하지만 그게 또 매력이야. 폴은 언제나 지금만을 보는 사람이야. 그래서 좋고.

나는 너무 많은 앞을 봤는데. 그런 건 타고 나는 걸까?


많은 앞을 보는 사람, 그가 맞았다. 여기에 와서 만난 건 그가 맞았다. 해인은 팔을 놓은 그의 손을 잡았다.


-너 맞네.

-뭐라고?

-너 맞다고.


그는 어떤 말을 꺼내려다 말고 웃었다.


-점심은? 이 근처에서 먹을까?

-너무 많은 앞에 나도 있었어?


해인은 점심 메뉴 보다 그게 더 궁금했다.

그는 앞장 서 가려다 말고 뒤를 돌았다.


- 내가 말했잖아. 앞에 남은 시간이 궁금해서 파리에 왔다고. 네가 여기 올 줄 알았어. 이렇게 다시 만날 것도 알았고. 만나면 얘기해줘야지, 기다렸어.

시간도 다르고 공간도 다른 곳에 서서 너를 기다렸어.

얼마동안인 건 중요하지 않아. 내 시간은 너와 다르게 흐르니까.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다시 뜨내기가 되는 것 같았지만, 아니야. 네가 오기 전 까지 여길 떠날 순 없었어. 나도 이곳에서의 생활을 만들어야 했지. 아침 종소리에 일어나 밖으로 나와. 청소차가 지나가고 그 사이를 달리지. 다리를 건너갔다가 가장 먼저 문을 여는 카페 앞으로 다시 돌아와. 커피를 한 잔 두고 신문을 읽어. 대단히 재미있는 소식은 없어. 프랑스어 수준을 확인하는 재미로 하는 거야. 게다가 뭔가, 이 도시의 붙박이들만 하는 행위 같잖아. 그러고나선 9시까지 학교로 가. 여기에서 프랑스 문학을 공부해. 그냥 그렇게 됐어. 떠나지 않아도 되니까 뭔가 배우고 싶더라고. 폴은 거기에서 알게 됐지. 그는 대학원생이야. 나를 알아본 첫 사람이고. 우리는 아이 이름도 같이 고민했어. 태어나기 전엔 제시라고 불렀어. 언어가 통하게 되고 나니 좋더라고. 가끔 번역일을 하거든. 언어를 다른 언어로 바꾸는 일이 머리 아프지만 재밌어. 이 단어가 어울릴까, 저 표현이 덜 어색할까, 해석을 하면서 나를 보게 됐어. 나는 어떤 문장일까. 어떻게 읽히고 싶을까. 그리고 널 떠올렸지. 해인아. 불렀을 때 들어 있는 온 마음들을. 너는 어떻게 해석할까. 나의 부재를, 이런 우연을. 네 앞에 나는 어떤 문장일까, 하고.


해인도 대답할 수 없었다. 작가의 의도 대로 번역하고 싶다. 그는 어떤 의미로 이 문장을 적었는가. 유람선이 지나가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문득 표를 끊은 그 배 위에서 그를 만나게 될 거라고, 신은 적어두었다. 다만 해인이 읽지 못했을 뿐이었다. 우연과 우연이 만나서 삶을 이루는 거라고 또 신은 적어두었을 것이다. 해인은 그것 또한 읽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서서 그의 손을 잡고 그가 이끄는 대로 걸어와 그의 이야기를 듣는 지금, 해인 역시 그와 같은 새로운 능력이 생긴 것 같았다. 신의 언어를 들을 수 있는 능력.


- 나는 원래부터 적혀 있던 문장이야. 처음부터 네 앞 어딘가에 있었던 문장이었고, 책장을 넘기면 그 다음 장에 쓰여질 문장이었어. 그런데 지금은 아니야. 바로 다음 읽을 문장이지.


손을 놓지 않은 채 그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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