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이 Aug 12. 2024

우리집 - 전에 없던 책장과 베란다

자연을 머금고 시간을 잇다

기억이 있는 어린 시절부터 결혼 전까지 늘 나만의 공간이 있었다. 그곳에는 내가 좋아하는 문구들이 있는 책상, 나를 키웠던 책들이 들어찬 책장, 어린 시절 취미였던 피아노가 있었다. 그 공간을 뒤로 하고 8평짜리 다세대 주택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한여름 보리차를 끊이면 온 집안이 후끈 달아 올라 불가마가 따로 없었다. 주말부부라 혼자 지내는 날들이 많아 8평도 충분했지만 누군가와 함께 하는 살림살이는 제법 덩치가 커 좁은 곳에 큰 짐들을 이고 지고 사는 버거움이 있었다. 어느덧 아이들 둘이 한꺼번에 찾아오고 그 사이 연립빌라를 지나 전세로 아파트를 거쳐 생애 첫 집을 장만했다. 우리 집이라지만 이곳에서도 한동안 내 공간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 집이 우리 집이었을까?! 


전세도 월세도 아닌 은행담보 최대치 70%를 잡고 산 우리의 첫 아파트. 서울이 아니라서 평수가 제법 넓다. 아파트 침체기에 제법 합리적인 가격에 모셔왔다. 매물도 많아 개중 고르고 고른 집이다. 14층에 12층. 로얄층이고 사이드가 아니라 한겨울 난방을 하지 않아도 따뜻하다. 특별했던 건 친환경 아파트라며 베란다에 화단이 있었는데 철거하고 나니 그곳에서 캠핑을 해도 될 정도로 널찍하다. 육아휴직 후 본사 발령으로 급히 마련한 집 치곤 운 좋게 인연을 잘 맺었다. 이사와 동시에 출근을 해야 해 제대로 이삿짐도 풀지 못 했다. 작은 집에서 큰 집으로 이사한 덕에 수납공간이 많아 짐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 짐 더미 그대로 공간을 채워나가도 번잡스럽지 않았다. 육아와 일을 병행하는 삶은 큰 이벤트 없이 잘도 흘러간다. 신혼 때 산 가구들과 함께 우리는 나이를 먹었고 집도 세월을 머금었다. 군데군데 아이들의 낙서와 스티커들이 붙고 벽 한쪽은 커가는 아이들 키 높이만큼 막대기가 하나씩 그어졌다. 아이들이 쑥쑥 자라는 동안 안으로 밖으로 바빠 애달게 마련한 ‘우리 집’ 임에도 불구하고 소중한 공간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바깥일로 지친 심신이 잠시 잠깐 머물다 가는 공간 일뿐이었다.


햇살과 바람이 머무는 우리 집 베란다


고요히 집에 머문다. 햇살이 이렇게나 따사롭게 드리우고 바람이 산들산들 소풍 오는 집인지 미처 몰랐다. 회사일로 바삐 보낸 평일을 보상받듯 여유를 찾겠다며 주말마다 자연을 담은 카페를 찾아 다녔던 내 옛모습이 무색해 진다. 널찍한 베란다에 캠핑의자를 가져다 놓고 커피 한잔을 먹으며 책을 본다. ‘그래, 이 맛이지!’ 이곳에서 읽는 책은 참 맛있다. 술술 잘도 넘어간다. 가끔 새소리도 나고 볼에 스치는 바람이 ‘얼굴 한번 들어봐’ 속삭이는 것 같다.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면 탁 트인 공터가 저 멀리까지 보인다. 그 너머로 맑은 날이면 파란 하늘에 흰구름이 그림처럼 조용히 흘러간다. 이보다 멋진 풍광이 어디 있을까?! 이곳에서 내가 좋아하는 카푸치노 한 잔, 책 한 권 그리고 신선한 바람 한 숨이면 족하다. 이대로 노을 질 때까지 물들고 싶다. 일을 그만두고 온전히 집에 머물고 나서야 우리 집이 자연을 듬뿍 담고 있는 집이란 걸 깨달았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예쁘다. 너도 그렇다.’ 비단 풀꽃과 사람만이 아니다. 내가 머무는 공간도 그렇다. 나를 담고 있는 ‘우리 집’도 살피고 시간을 두고 바라보아야 어여쁜 걸 안다. 잠만 자며 스쳐 지나갔던 세월에 미쳐 알아채진 못했지만 이제라도 알게 되어 다행이다. 


과거, 현재, 미래로 연결되는 책장 


넓은 집으로 이사오며 전에 없던 묵직한 책장을, 그것도 2개나 마련했다. 결혼 후 처음 마련한 책장이다. 아주 듬직하니 온갖 책을 다 품을 것 같다. 정착할 곳이 없어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책을 한데 모아 녀석들의 성격과 모양에 따라 자기만의 방을 마련해 주었다. 의도적으로 손을 번쩍 들어 집어야 하는 맨 위 칸에는 건조하고 지루하지만 밥벌이에 필요한 책들을 놓았다. 눈높이에서 시야에 자주 들어오면 무의식적으로 일이 생각나 부러 먼 방을 내어 주었다. 존재해야 하나 내외하는 사이다. 가장 안정감 있는 눈높이 칸에는 지금 읽고 있는 책들. 그러니깐 지금의 내 감정 흐름과 정서에 맞는 책들의 방이다. 그리고 그 옆으로 꿈을 쫓던 스무 살 나를 키웠던 책들, 내 인생에 지침이 되는 책들로 채웠다. 흰 종이가 세월에 맞닿아 점점 노랗게 물들어간다. 내 삶과 함께 농익어간다. 그 시절 이 책을 들게 했던 감정과 고민거리들이 떠오른다. 그땐 그렇게나 무거웠던 상념들이 지금은 가볍다. 지금의 버거운 마음도 훗날 가벼워 질 꺼라 이 책들이 말해 준다. 눈을 아래로 좀더 내리면 아이들 눈높이에 맞는 알록달록 모양이 제각각인 동화책, 육중한 책장에 전집하나 꽂아줘야 할 것 같아 산 역사책 시리즈, 세계여행을 꿈꾸며 샀던 여행서, 월급으로부터 독립을 도운 재태크 책들이 자리하고 있다. 한쪽 벽면을 채우는 건 모두 책이지만 한 칸 한 칸 색채가 다르다. 그리고 그들이 내게 선사하는 세계도 다르다. 큰 책장에 책을 한 가득 꽂아 넣으니 부자가 된 기분이다. 부자는 시간과 공간을 자유로이 쓰는 사람이라는데 책장이라는 공간을 얻고 과거와 현재, 미래로 연결된 책들을 내 맘대로 놓을 수 있으니 나는 진정한 부자다. 


함께 하는 시간이 깊어질수록 나를, 우리를 담고 있는 우리집이 우리를 닮아가고 있다. 집안 곳곳에는 우리들의 흔적들이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고 내 시간은 유유자적 이곳에서 흐른다. 집안에 있지만 창으로 밖과 연결되어 있고 책으로 세상과 연결되어 흘러간다. 없던 공간이 새로이 생기고 살피고 드려다 보니 내가 누리는 것들이 많아진다. 오늘도 고요히 머무는 우리 집 창문 밖으로 하늘 위 흰구름이 거닌다. 오늘 하루도 맑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