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저에게는 동생이 3명이 있었습니다. 두 살 밑 여동생, 4살 밑 남동생 그리고 10살 밑 막내동생 이렇게 3남 1녀였습니다. 제가 ‘있습니다’라는 말 대신에 ‘있었습니다’를 사용하는 이유는 3명의 동생들이 그대로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고 3때 막내 동생이 먼저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막내 동생이 빠진 2남 1녀가 되어있습니다.
막내 동생은 늦둥이었습니다. 저하고 10년 차이가 나고 부모님께서 마흔 언저리에 낳은 아들입니다. 늦둥이다 보니 집안의 사랑을 독차지 하며 귀하게 자랐습니다. 저희 집은 아버지가 3대 독자일 정도로 손이 귀한 집안이었습니다. 그래서 할머니께서는 손자에 대한 욕심이 많으셨습니다.
저와 남동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늦게 태어난 막내동생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습니다.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저조차도 질투가 났을 정도였으니까요.
할머니 뿐만 아니라 저희 남매들도 막내를 서로 보겠다고 싸우고 난리였습니다. 특히 여동생과 저는 막내를 놓고 서로 보겠다고 많이도 싸웠던 기억이 납니다. 할머니께서도 늘 막내를 끼고 사셨습니다. 연로하신 연세에도 막내를 업고 동네를 다니시며 자랑을 하셨습니다.
동네 어른들도 막내를 보면서 ‘잘 생겼다’, ‘귀티가 줄줄 흐른다’, ‘나중에 큰 인물 되겠다’ 등 칭찬 일색이었습니다. 물론 입에 발린 소리긴 했지만요. 그렇게 동네에서나 집안에서 귀여움을 독차지 하면서 곱게 자라던 막내가 5살이 되던 해부터 조금씩 이상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잠을 자다가 갑자기 경기( 驚氣 )를 시작했는데 당시 동네에서 의사라고 불리던 분(의사 면허증이 없는 그냥 동네에서 의원이라고 불리던 사람)이 와서 손발을 따고 찬물을 먹였는데 그때부터 증상이 더 심해지기 시작을 했습니다. 급기야 아버지께서 막내를 데리고 종합 병원을 갔습니다.
그렇게 병원을 갔다 오고 난 후부터 부모님의 한숨소리가 늘어나기 시작을 했습니다. 잠결에 들은 두 분의 이야기는 막내가 뇌에 이상이 생겼고, 지능이 점점 떨어지고, 결국 말도 못할 거라고 했습니다. 그때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의 말씀이 현실이 되어 눈으로 확인하는데는 6개월이면 족했습니다. 똑똑하다고 난리가 났던 막내는 점점 어린아이가 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밥도 혼자 못 먹고, 화장실도 혼자 못 가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 하고, 집을 나가면 집을 찾아오지도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막내를 서로 보겠다고 난리였던 저희 남매들은 이제 막내를 서로 보지 않겠다고 싸우고 난리였습니다. 그동안 집안의 자랑이었던 막내는 집안의 부끄러움이 되었습니다. 저는 막내가 그런 모습을 보인 이후로 단 한 번도 친구들을 집으로 데리고 오지를 않았습니다. 심지어 동네 친구들까지도 말입니다.
동생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동네 친구들의 사랑방 같았던 집이 어느 순간부터 정적이 흐르기 시작을 했습니다. 친구들의 소리와 할머니의 고함으로 가득 찼던 집안이 부모님의 깊은 한 숨소리로 채워졌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던 해 부모님은 셋째와 막내를 데리고 도시로 분가를 하셨습니다. 저는 여동생과 함께 할머니와 살게 되었습니다. 엄마와 떨어지는 것이 싫었지만 한편으로는 막내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마음에 살짝 편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부모님이 계신 곳에서 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그 동안 막내를 가끔씩 보다가 매일 봐야하는 상황은 정말 힘들었습니다. 말도 제대로 못하고, 늘 챙겨야 하는 막내는 저를 너무 힘들게 했습니다. 더군다나 막내가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모든 책임은 장남인 저에게로 왔습니다.
친구들을 집으로 데리고 올 수도 없었고, 학교가 끝나면 집으로 와서 막내를 봐야 했습니다. 누군가가 가족관계를 물으면 막내의 존재를 아예 부정해 버렸습니다. 막내로 인해 집안의 분위기며, 저의 생활이 다 무너져버린 것 같았습니다.
고3 여름방학.
대학에 대한 스트레스가 막내와 가족들에게 향했습니다. 급기야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인 가출을 감행했습니다. 무작정 나선 길이었습니다. 목적지도 목표도 없이 그저 집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으로 집을 나왔습니다.
가출 첫날부터 하늘에서는 굵은 빗방울이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내리기 시작한 비는 2-3일 동안 퍼부었습니다. 내리는 비를 보며 참 많은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그렇게 싫었던 막내가 보고 싶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하고, 가출 3일 만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며 막내가 좋아하는 과자를 샀습니다. 그동안 미워했던 것에 대한 미안함도 있었고, 스트레스를 동생에게 많이 푼 것 같아 사과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집으로 갔는데, 집안의 분위기가 좀 이상했습니다. 있어야 할 막내가 보이지 않았고, 저를 보신 어머니께서 저에게 ‘막내가 집을 나간지 3일이나 되었는데 아직도 안돌아온다’라는 말을 하셨습니다.
평소에도 막내는 집을 나가면 집을 못 찾아 그 다음날 경찰서나 보호기관에서 막내에게 걸어 놓은 명찰을 보고 전화가 왔기에 크게 걱정을 하지 않았는데 이번처럼 3일이나 연락이 없는 것은 처음이라 실종신고를 하고 가슴을 졸이며 기다렸습니다.
제가 가출을 하고 온 다음날 경찰서에서 기다리던 전화가 왔습니다. 그러나 전화의 내용은 우리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000댁이시죠. 여기 00결찰서입니다. 지금 사체 한구가 발견이 되었는데 인상착의가 비슷해서요. 와서 확인을 해 주셔야겠습니다’
전화를 끊자마자 가르쳐 준 곳으로 정신없이 내달렸고, 하얀 천에 쌓인 동생을 보았습니다. 익숙한 신발, 옷 그리고 손에 꼭 쥔 장난감. 동생이었습니다. 그렇게 막내 동생은 세상에 온지 9년 만에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정신없이 장례를 치르고 동생의 유품들을 정리하며 참 많이 울었습니다. 어머니께서 제가 가출을 한 다음날부터 막내 동생이 창밖만 보다가 집을 나갔다고 했습니다. 어쩌면 제가 가출만 하지 않았으면 막내 동생은 그렇게 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무거운 죄책감을 가졌습니다.
많은 어른들이 저희 가족을 위로하시면서 수많은 말들을 쏟아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무 사랑하셔서 일찍 데리고 가신 것 같네’
‘좋은 곳에 갔으니까 감사해야지’
‘저런 모습으로 살아가느니 오히려 잘 된 일일 수 있어’
‘시간이 약이야. 조금만 참아’
‘다 잊어버리고 남은 자식들 생각하며 살아야지’
어른들이 쏟아내는 말들은 저의 죄책감을 더 무겁게 했습니다. 그 죄책감은 참 오랜 시간 무겁게 저를 눌렀고, 제 자존감에 큰 생채기를 냈습니다. 세상을 바른 눈이 아닌 삐딱한 눈으로 바라보게 했으며, 늘 비관적이고 염세적이게 만들었습니다.
부모님도 동생들도 막내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저에게 돌리는 것 같았습니다. 막내가 저렇게 된 것이 저의 가출 때문이라고 생각을 하시는 것 같아 참 많이도 힘들었습니다. 어쩌면 그런 마음들이 대학을 입학 한 후부터 가족들과 떨어져 혼자 살게 된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누군가는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거라고 했지만 저는 달랐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죄책감은 저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동생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눈에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동생이 보고 싶고 그리워서가 아니라 동생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이 저를 못 견디게 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심리상담을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상담을 공부하면서 어쩌면 나의 내면의 상처도 치유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감이 들었습니다. 미친 듯이 상담과 관련된 서적을 읽었고, 상담을 받으러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기대와는 달리 책이나 상담들이 저의 상처를 치유하지는 못했습니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저를 상담하신 분들이나 제가 읽었던 책들이 저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던 것입니다.
석사 3학기 여름방학에 또 다른 기대와 희망을 갖고 3박 4일간의 집단 상담에 참가를 했습니다. 첫날과 둘째날은 다른 집단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3일째 되던 날 조심스럽게 속에 담아 두었던 막내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참여한 집단원들이 저를 위로하기 시작했고, 힘을 내라고 ‘파이팅’을 외쳐 주었습니다.
'힘내라', '잊어라','시간이 약이다' 등 그동안 참 많이도 들었던 말들이었습니다. 기대가 컸다고 생각하고 긴 한 숨을 내쉬었습니다. 한 숨을 내쉬고 고개를 드는 순간 옆에 있던 선생님 한 분이 저의 손을 꼭 잡고 제 어깨를 가만히 감싸고는 나즈막히 말씀 하셨습니다.
‘참 많이도 힘드셨겠군요. 잘 버텨내셨습니다. 잘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만 내려 놓으셔도 됩니다. 선생님 잘못 아닙니다. 동생의 사고, 죽음 선생님 잘못 아닙니다. 그러니 이제는 동생에 대한 미안함을 내려 놓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인생을 사시면 됩니다. 그러셔도 됩니다’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동생이 죽고, 무거운 죄책감을 안고 살던 제가 진짜 듣고 싶었던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누구도 저에게 ‘너의 잘 못이 아니야’라는 말을 해 준 적이 없었습니다. 그저 힘내라, 잊으라는 말만 들었습니다. 그래서 동생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은 당연히 제가 짊어져야 할 짐이라고만 생각을 했습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그 죄책감속에서 제가 진정 듣고 싶었고, 원했던 말이 ‘너의 잘못이 아니야’라는 말이었습니다.
지금 제가 동생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을 내려놓고 살아 갈 수 있는 이유가 그때 들었던 ‘너의 잘못이 아니야’입니다. 어쩌면 부모에게 학대를 받고 자란 분들, 이유 없이 타인에게 폭력을 당한 분들, 친구들에게 폭력을 당하고 왕따를 당한 청소년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말이 ‘너의 잘못이 아니야’가 아닐까요?
지금 이렇게 힘들어진 상황이 ‘너의 잘못이 아니야’라는 말이 어쩌면 지금 내 자녀, 혹은 아내, 남편에게 필요한 말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짊어지고 있는 무거운 짐이 있나요? 내려놓으셔도 됩니다.
절대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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