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소금과 후추
중학교 역사 시간에 후추를 얻기 위하여 유럽에서 전쟁이 벌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놀라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첫째, 부엌으로 가면 으레 보이는, 몇천 원만으로 손에 넣을 수 있는 후추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전쟁까지 일으켰는지 상상이 안 갔고, 둘째, 조금이라도 더 맛있게 먹겠다고 목숨 걸고 싸운 인간들이 참 징하다 싶었다.
그 당시 후추가 신문물이고 식욕은 인간의 가장 큰 욕구 중 하나란 걸 생각하더라도 후추 전쟁은 여전히 내겐 마음에 와 닿지 않는 사건이었는데, 직접 음식을 만들어 먹기 시작하면서 이야기가 달라졌다. 후추를 얻고자 전쟁까지 일으킨 옛날 사람들의 마음이 절절하게 공감이 되던 것이다.
계란찜 하나라도 만들어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소금을 넣고 안 넣고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음식을 만들 때 적절한 간은 생명이다. 단순히 익혀서 '먹을 수 있는' 상태의 음식이, 양념을 하고서야 비로소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요리로 변한다. 방금까지 니맛내맛도 없던 토마토 수프가 어떻게 소금과 후추, 파슬리만 넣었다고 이렇게 맛있어질 수 있는지. 정말 마법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각종 화려한 향신료가 없어도, 소금과 후추만 있으면 원하는 맛은 얼추 다 낼 수 있다. 토마토 수프에 파슬리가 빠져도 소금이랑 후추가 있다면 감칠맛과 시원함이 깃든다. 소금은 고기의 경우엔 감칠맛뿐만 아니라 질감에도 변화를 준다. 고기를 요리하기 전에 염지 과정을 거치는 것은 맛과 식감에 모두 좋은 변화를 불러온다.
이처럼 먹는 것에 있어 필수 불가결해 보이는 소금과 후추지만, 사실 얘네가 없다고 해서 생존에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다. 나트륨은 생명 유지에 필수적이지만, "죽지 않을 만큼의 나트륨"은 자연식품으로부터 충분히 얻을 수 있다. 조미료로서의 소금은 어디까지나 '맛'을 위한 목적이 크다. 후추는 애초에 영양가를 더하지도 않는다. 음식의 풍미를 끌어올려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 소금과 후추 없이 살던 시대의 사람들도, 도저히 맛은 없을지라도 그냥저냥 먹고살 수는 있었다.
하지만 소금과 후추를 넣은 음식의 맛을 한 번 보고 나면, 도저히 이전의 흐리멍덩한 요리를 먹는 삶으로 돌아가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그동안 후추가 없던 상황에서 처음 맛본 후추의 위력은 사람들을 전쟁으로 이끌고도 남았겠구나 싶었다. 소금과 후추만 있으면 이렇게 달라지는데! 단순히 배만 채우던 일이, 온갖 감각이 살아나는 행복한 시간으로 바뀌는데 말이다! 그래서 전쟁을 했구나. 중세시대로 돌아가 절절히 공감한다.
원래 과학을 전공하던 내가 철학으로 막 전공을 바꿨을 무렵, 한 수업에서 "철학은 실용적으로 가치가 있냐"는 질문을 다 함께 생각해본 적이 있다. 흥미롭고 놀라웠다. 과학을 공부할 땐 아무도 묻지 않았던 질문. 그리고 쉽사리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
학계에 뜻을 두지 않은 이상 철학 학위만으로는 취업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정말..), 철학을 전공한다고 하면 처세술에 어수룩할 것이라고 멋대로 납득하는 사람도 있다. (제가 허당끼가 있는 건 철학 전공이어서가 아니라 그냥 성격입니다!!!) 모두 철학을 어딘가 '실제적인' 것과 동떨어진 공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지로 치면 경제학이나 통계학과는 정반대 되는 지점에 서있으려나.
이럴 때마다 반항하고 싶어 진다. 세상에 철학만큼 유용한 게 어딨냐고. 나는 다른 공부를 하다가 왔으니까 더 잘 알 수 있다. 철학이 당장 내 삶에서 얼마나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지. 그리고 내 삶에서 유용하게 쓰이는 것보다 '실용적'인 게 있는지.
소금과 후추의 실용성을 설명해보라고 하면 나는 아마 '음식에 간을 해준다'는 심심한 답을 내놓을 것이다. 하지만 이 단순한 사실이 먹는 사람에게 있어선 엄청난 차이다. 간을 안 해도 먹는 데에는 별 문제가 없다. 그러나 체감상으로는 음식이 질적으로 차원을 바꾼다. 내 생각엔 철학도 이와 비슷하다. 철학은 무엇이든 더 정돈된 방식으로 알게 도와준다. 이 또한 말로 느껴지는 것보다는 직접 살아가는 입장에서 느끼는 바가 훨씬 크다. 내가 살고 있는 세계가 뒤바뀌진 않지만, 내게 벌어지는 일들을 내가 받아들이는 방법이 바뀐다.
제대로 된 담론을 위해서는 먼저 언어부터 정립해야 한다는 건 괜히 하는 말이 아니다. 마땅한 도구가 있어야 현상을 보다 제대로 분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은 내 삶에 있어서 현상을 분석하게 도와줄—내가 경험하는 것들을 정돈된 방식으로 알게 해 줄—도구가 되어준다. 마구잡이로 들어오는 경험들에 격자무늬가 쳐지는 느낌이랄까. 이렇게 분석의 도구를 가지고 차곡차곡 정돈하다 보면, 이전엔 보이지 않던 패턴이 보이거나 겉보기 이면의 차원이 신경 쓰이기도 한다. 말이나 생각을 할 때는 제대로 된 논리 위에 세워진 것인지 조금이나마 의식하게 된다.
이 모든 건 그야말로 원래 살던 삶에 소금과 후추를 뿌리는 것 정도의 일일 뿐이지만, 직접 체감하는 그 '맛'은 차원이 다르다. 내가 느끼는 바를 군더더기 없이 그대로 말하자면 "뇌가 쾌적해지는 기분"이라 하겠다. 새로운 가전제품을 집에 들였을 때처럼, 확실히 철학 덕분에 나의 삶의 질은 "실질적으로" 상승했다.
철학이라는 도구가 유용하게 쓰이는 건 또 있다. 바로 상대방과의 대화에서다. 흔히 사람들은 윤리 즉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대한 얘기만 나오면 감정이 격해지는지 좀처럼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이 믿는 바만 반복해서 얘기하는 경향이 있다. 철학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 '게임의 룰'을 알려준다. "다들 자기가 믿는 바를 주장으로 얘기해. 하지만 그러려면 우선 네 주장을 최대한 그럴듯하게 만드는 논증을 함께 준비해야 해. 논증을 만들 때는 논리학에 있는 규칙을 참고들 하고. 그럼 이제 이 중에서 가장 맞는 말을, 규칙을 위반하지 않은 채 하는 사람이 이기는 거야."
여기서는 남이 뭔 소리를 하건 일단 내가 생각하는 바가 맞다고 떼를 쓰는 건 안 먹힌다. 강제 퇴장이다. 반박을 하고 싶으면 규칙에 따라서 조목조목 반박해야 한다. 규칙은 지켰지만 아예 딴 세상 이야기 같은 내용을 가지고 나오는 사람도 물론 있다. 새로운 정의와 새로운 가정 하에서 내놓는 그들의 주장은 무척 낯선 것이어서 듣고 있는 것조차 힘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대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지 우선 '정리'해야 받아들일 수 있어야 제대로 된 반박도 할 수 있다. 그래야 합법적으로 게임에서 이길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이 게임 속 던전이라면 더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있을수록 유리하다. 플레이어의 직업이 전사라면 말 그대로 아이템을 장착해 '무기'를 들겠지만, 만약 마법사라면 무기 대신 '마법' 스킬을 익힐 것이다. 던전에 출현하는 몬스터는 칼로 때려잡는 방법도 있지만 원거리에서 마법을 시전해 잡을 수도 있다. 흔히 실용적이라고 일컬어지는 학문이 전사 직업의 무기와 같다면, 철학은 마법사의 마법일지도 모른다. 형태는 다르고, 작용하는 방식도 다르지만, '무기'를 안 쓴다고 마법사가 몬스터를 못 잡는 게 아니다. '무기'처럼, '마법'도 충분히 유용하다. 그리고—적어도 내 정의 하에서는—충분히 실용적이다.
나는 음식에서 소금과 후추가 벌이는 마법도 믿지만, 철학이 내 삶에서 벌이는 마법도 믿는다.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해서 삶에 철학을 끼얹어볼 생각이다. 후추를 위한 전쟁처럼 목숨을 걸어야 할 일이 있을까? 어쩌면 취직이 안돼서 생계를 걱정해야 할 일이 있을지도...? (흑흑) 그렇다면 공통점이 하나 더 늘어난 셈이다. 그러니까 더 자신 있게 주장할 수 있다. 삶에 철학을 뿌려보세요, 정말 맛있어진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