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들의 공리를 증진시킬 수 있을까?
채식을 해보려고 몇 번이고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있다. 윤리적인 이유였다. 음식으로 소비되는 동물들의 삶과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이고 싶다는 게 내 진심이다. 그러나 '생각'이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한 까닭은 내가 고기를 너무 좋아했기 때문이다. 아니, 조금 더 변명을 해보자면 단순히 고기의 맛을 좋아한다기 보단 (물론 맛도 있지만...) 고기를 안 먹으면 금단증상(?)이 나타나서 도저히 견디지를 못하겠는 것이다. 하루 종일 집중이 안되고, 아무리 많은 양을 먹어도 포만감이 느껴지지 않으며, 기운도 나지 않는다. 그래서 나의 채식을 위한 시도는 번번이 48시간도 채 넘기지 못하고 중단되곤 했다.
윤리적인 이유로 채식을 한다는 생각, 즉 '옳은' 행위를 하기 위해 공동체 내의 구성원들의 '고통을 줄이는' 방향을 택한다는 생각은 공리주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자주 들어봤을 것이다. 일명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공리주의는 애초에 사회의 법률을 제정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이론이어서 그런지, 단순히 개인적 차원의 문제보다 공동체의 구성원을 전부 고려해야 할 때 더욱 의지하게 되는 이론이기도 하다.
공리주의에 따르면 '옳은' 행위란 '좋은 것을 가장 많이' 생산해내는 행위이다. 즉 그 행위의 결과가 어떤가에 따라서 행위의 옳고 그름이 결정된다. 그리고 이때 좋은 것이란 단순히 나한테만 좋은 것이 아니다. 나를 포함하여 다른 이들까지 고려한, 공동체 '전체'에게 좋은 것을 말한다.
대표적인 공리주의 철학자인 벤담과 밀은 '좋은' 것이란 곧 '즐거움'과 같은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즐거움과 반대되는 '고통'은 '나쁜' 것이 되는 식이다. 따라서 누군가의 행위가 옳은지 아닌지 따질 때는 그 행위가 결과적으로 즐거움과 고통을 각각 얼마나 이끌어내는지를 살펴봐야 하며, 우리는 마땅히 좋음을 극대화시키는 방향으로—가장 많은 수에게 가장 많은 양의 좋음을 가져오는 방향으로—행동해야 한다.
이처럼 행위가 가져오는 결과를 생각할 때 그 고려 대상에 동물들까지 포함하는 건 공리주의에 따르면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일 지도 모른다. 즐거움과 고통, 즉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생물은 비단 인간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벤담 그 자신부터가 "이성을 사용할 수 있느냐, 말을 할 수 있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다만 고통으로 괴로워하느냐suffer가 문제이다"라고 말했다는 사실은 이러한 견해에 힘을 실어준다.
그렇다면 채식은 공리주의적인 관점에서 확실히 더 옳은 선택이다. 번번이 실패해왔지만, 역시 생각하는 바와 실천하는 바가 일치하는 삶이 멋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시 한번 궁리해본다. 육류를 안 먹는 대신 생선을 먹으면 어떨까? 소위 말하는 페스코 채식Pescetarianism 말이다. 소와 돼지가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고, 닭이 속하는 조류 또한 포유류와 거의 비슷한 범위의 감정을 느낀다고 한다. 육류 대신 생선을 소비하면 그들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줄 수 있는 데다가 생선은 훌륭한 단백질원이니 금단증상도 없을 것이다.
...라고 생각한 찰나, 나는 잠시 스스로에게 놀랐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선은 감정을 느끼지 않을 것이라고 전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뒤이어 많은 의문이 생겼다. 생선은 고통을 느낄 수 있나? 고통을 느낀다면, 그걸로 인해 감정적으로 괴로워할까? 그렇다면 소, 돼지, 닭 대신 생선을 먹는 것이 윤리적으로 더 옳은 선택일 수 있을까?
그 이후로 한참을 물고기가 감정을 느끼는지에 관해서 찾아봤다. 가장 신뢰할만한 답을 찾을 수 있었던 건 <Do Fish Feel Pain물고기도 고통을 느낄까?>라는 책으로부터였다. 저자인 Victoria Braithwaite는 단순히 고통을 느끼는 것과 그로 인해 감정적으로 괴로워하는 것의 차이를 설명하며, 물고기에게 이 두 가지가 모두 가능하다고 결론지을만한 근거들을 소개하고 있었다.
단순히 고통을 신체적인 신호로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감정적으로 괴로워하는 건 모든 생물에게 가능한 일은 아니다. 어떠한 생물들에게 이 능력이 있는지를 검증하는 것 또한 까다롭다. 우리는 인간이 아닌 다른 종이 이 세계를 어떤 식으로 경험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험을 설계하는 것도 어렵고, 실험에서 나온 결과를 가지고 확언을 하는 것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고기에게 감정을 느낄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는 다양한 실험들을 읽고 있자니 나도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물고기는 괴로워할 수 있는 것 같다고.
이렇게 되면 이야기가 좀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물고기도 감정을 느낄 수 있다면, 페스코 채식을 하겠다는 나의 시도는 과연 동물들의 공리를 증진시킬 수 있을까? 벤담은 행위의 도덕적인 가치를 계산할 때 고려되어야 할 다음과 같은 요인들을 언급한다. 그 행위가 산출하는 즐거움이나 고통이 얼마나 '강렬'한지,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지, 얼마나 '확실'하게 즐거움이나 고통이 따라나오는지, 이후에도 즐거움이나 고통을 계속 야기하는지 등등. 여기에 행위로 인해 영향을 받는 구성원들의 수도 고려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내가 소 한 마리를 먹는 대신 생선을 세 마리 먹는 게 오히려 동물들의 고통을 더 많이 산출하는 행위가 되진 않을까? 소와 돼지 그리고 닭의 경우에는 인도적인 도축을 위한 시스템이 최소한으로나마 갖추어져 있는데, 생선은 그런 게 있던가? 그물로 끌어올려진 후 얼음 위에서 질식사할 때까지 생선이 느낄 고통과 도축장에서 돼지가 느낄 고통 중 어떤 것이 더 강렬하고 더 오래 지속되는 걸까?
밀의 경우에는 즐거움에 차등의 가치를 두기 때문에 더욱 복잡해진다. 지적인 즐거움이 다른 종류의 즐거움보다 훨씬 가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능이 더 높은 동물의 감정을 보다 우선시해야 하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얼마나 더? 동물들 중 인간의 지능이 가장 높으니 인간이 고기를 먹으면서 느끼는 즐거움으로 동물들이 느끼는 고통을 상쇄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맛으로 인한 즐거움은 지적인 즐거움이 아니니 오히려 무시해도 되는 걸까?
좀처럼 확실하게 대답할 수가 없다. 애초에 공리주의에서 이런 걸 계산할 확실한 공식을 제공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벤담은 이런 걸 일일이 계산하는 걸 추천하지 않는다! 경험적으로 생각하면 웬만한 답은 다 나온다고 말한다), 그나마 주어진 기준을 사용해봐도 실질적으로 즐거움과 고통의 양을 산출해내거나 비교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이건 공리주의에게 가장 일반적으로 가해지는 비판이기도 하다.
보다 옳은 행동을 하고자, 동물들의 공리를 증진시키는 선택을 하려고 했던 것인데 대체 어떤 선택지가 그들의 공리를 증진시키는 것인지 결국 답을 찾을 수가 없다. 페스코 채식을 하자니 이게 오히려 동물들 전체의 행복을 늘리기는커녕 고통을 가중시키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고, 그렇다고 다 포기한 채 완벽한 육식 인간으로 살자니 양심에 찔린다. 어느 걸 선택하든 고민이다.
아직까지도 나의 채식을 위한 시도는 번번이 실패하는 중이다. 세상에 고기만큼 좋은 음식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고기를 장바구니에 넣을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다. 아직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살기에는 멀었다.
고기를 포기할 수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실천하는 것은 동물복지 인증을 받은 제품을 구매하는 것. 특히나 달걀 같은 경우에는 동물복지 제품과 그렇지 않은 제품 사이에 차이가 확연해서 오히려 닭들에 대한 미안함이 더 커질 때가 있다. 아직까진 동물복지 인증 제품이 많지 않아서 선택의 폭도 좁고, 가격이 훨씬 비싸다는 점이 살짝 부담으로 다가올 때도 있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기꺼이 감내할 수 있다. 아쉬운 게 있다면 동물복지 인증을 받은 생선은 없다는 점? 아직 생선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지 않아서 그런 것일까.
인증을 받은 제품을 사더라도 죄책감을 완전히 덜 수는 없다. 그저 고기를 먹은 만큼 더 열심히 살겠다며 동물들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전할 뿐이다. 나를 위한 동물들의 희생을 헛되지 않게 하려면, 난 아무래도 정말 정말 열심히 살아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