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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방의 공돌이 Apr 17. 2022

일단 몸부터 움직여야

나는 성실하다. 얼마나 성실한지 별 중요하지도 않는 일도 대충하는 게 없다. 그게 문제다. 필요 이상으로 성실해서 일 복이 차고 넘친다. 좀 덜 성실해야지, 라고 굳게 다짐해도 어느새 일에 몰두해 있다. 이번엔 절대로 최선을 다 안 해야지, 라는 다짐으로 시작했다가 다 끝난 후엔 아! 나도 모르게 최선을 다해버렸네! 라고 한숨을 쉬게 된다.


어떤 일이 생기면 이게 내 일인지 남 일인지 따지며 뭉개다가 어떻게든 남에게 떠넘기는 게 슬기로운 직장생활의 지혜라 배웠거늘, 나는 왜 긴 시간 보고 배운 것을 따르지 못 하고 무엇이든 열심히 한단 말인가. 보고 있기 답답해서 내가 해버리고 마는 성격, 어떤 요청도 부탁으로 받아들이고 차마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 탓이다.


타고난 기질이려니 생각한다. 그래서 자주 억울하다. 늘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니, 남보다 먼저 삽을 들고 마른 땅을 향해 달려들어야 하는 갈증 심한 체질인만 억울한 것이다.


오래 전에 깨달은 문제이고 또 오랫동안 고쳐지지 않았으니 받아들이기로 했다. 차라리 게으름뱅이로 태어나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로 하니 그나마 덜 억울하다. 암. 게으름뱅이로 사느니 술주정뱅이가 더 낫겠다. 술주정뱅이는 술이라도 열심히 마시지, 게으른 건 용납이 안 된다.


나의 성실은 회사를 위해서가 아니다. 회사에서 인정받길 원해서도 아니다. 그저 주어진 일이니까 열심히 하는 것이 첫 번째이고, 두 번째는 경력을 위해서다.


직장인에게 경력만큼 중요한 게 있을까. 직장인에게 회사는 배경이고 경력은 힘이다. 경력소개서에 기입할 멋진 경력도 좋지만, 능력을 향상 시키고 내적 성장을 일으키는 경력도 중요하다.


나는 공장에서 쇠파이프를 자르고 용접을 하면서 그 일을 노동시장에서 경쟁력 잃은 중년 앞에 던져진 시련으로 여기지 않았다. 갈수록 근육이 단단해지는 것을 보며 지금껏 가치를 두고 몰두했던 지적 성장이 육체적 성장보다 우월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미세한 파형을 측정하는 계측기가 아닌 붉은 쇳가루를 뿜어대는 거친 장비를 사용하면서는 삶의 목표가 보다 선명해졌다.


작가 생활 역시 마찬가지다. 글쓰기에 진심이었다. 다층적이고 복잡한 인간의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하고, 논리 구성이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노력했다. 나의 글이 원하는 곳까지 닿지는 않았지만 덕분에 기술문서를 작성하는 것은 전보다 훨씬 쉬워졌다. 엔지니어가 글쓰기에 자신감이 있다는 것은 엄청난 경쟁력이다.


지금까지 글을 쓰고 작품을 발표하면서, 또 저임금 공장 노동자로 지내면서, 내가 실천한 건 일단 몸부터 움직여야 작은 파장이라도 일어난다는 정신이다. 나의 소설은 무슨 효용이 있는가, 여기서 노가다나 하는 게 무슨 의미인가, 라는 생각은 인생에 어떠한 파장도 일으키지 못한다. 일단 몸을 움직여야 작은 파장이 생기고, 그것이 물결을 일으키고 파도를 만든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나의 성실을 대변하는 정신이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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