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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 도서 번역가의 첫 번째 교훈: 완벽보다 완성

by Lyla

나의 첫 사회 과학서 번역. 한 챕터를 처음으로 쭉 번역하고 다시 읽어봤는데 정말이지 별로였다. 대학원까지 나와서 번역으로 먹고살고 있지만 도서 번역은 완전히 다른 세상인 것 같았다. 나는 과연 도서 번역을 잘할 수 있을까? 잘하는 것은 바라지도 않게 되었다. 도서 번역을 하긴 할 수 있는 걸까? 갑자기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첫 번째 챕터 이후로는 번역 속도가 잘 나지 않았다. 어제 수정한 문장을 오늘 읽으니 또 마음에 안 든다. 겨우 고민해서 다시 썼는데 그다음 날에 핵심이 되는 용어를 다르게 번역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챕터 전반에 걸쳐서 다시 용어를 다 수정한다. 이런 식이다.


역서 출판에 있어서 번역할 외서를 찾고 역서 출판 권리를 따는 게 제일 어려운 부분일 거라 생각했다. 그것만 해내면 번역, 편집, 출간은 물 흐르듯 진행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번역이 가장 큰 걸림돌처럼 느껴졌다. 그동안 외서에 대해 가졌던 나의 생각을 잠시 돌아봤다.


나는 읽는 행위를 즐긴다. 뉴스 기사, 잡지 아티클, 각종 보고서, 소설, 에세이, 시집, 자기 계발서, 철학서, 사회 과학서 등을 특별히 가리지 않는다. 도서 국내도서와 외서 중에서 읽는 비중을 따지자면 외서를 더 즐겨 읽는 편이다. 주로 유럽 소설과 미국 에세이, 자기 계발서, 사회 과학서 등을 읽었고 지금도 즐겨 읽는다. 원서로 읽기도 하고 번역서로도 읽는다. 그런데 자기 계발서와 사회과학서의 경우 번역이 아쉬운 경우가 꽤 있었다.


우선 소설의 경우 번역문의 아쉬움을 덜 느낀 이유부터 생각해 봤다. 소설 번역가는 사실상 원서의 한국어 버전을 쓰는 작가에 가깝다. 원서를 쓴 작가의 감정과 생각의 흐름을 한국어로 재탄생시키는 역할을 한다. 역자에 따라 역서의 전반적인 느낌과 분위기가 달라진다. 그리고 약간 어색한 것 같은 표현이 있더라도 예술의 영역이라고 생각되어 그 어색함이 독특함으로 승화되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가끔은 소설 역서의 어색한 표현들이 주는 생경한 느낌이 좋기도 하다. 원서 작가가 전달하려고 했던 것과 얼마나 많이 동 떨어졌을지 몰라도, 거기서만 느낄 수 있는 심상 속에 푹 빠져있는 것이 즐겁기도 하다.


자기 계발서나 사회 과학서는 다르다. 어색한 한국어 표현은 불편함을 자아낸다. 그리고 내용의 흐름을 해치거나 핵심이 흐려진다. 예술적인 문장보다는 의도와 메시지를 충실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문장이 많은 장르라 오역이나 어색한 번역이 상대적으로 쉽게 노출된다. 읽다 보면 초반부는 읽기 좋은데 후반부로 갈수록 번역의 질이 떨어지는 경우도 있다. 종종 '내가 번역해도 이 것보단 잘하겠다'와 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마음속으로 혀를 차며 책을 덮기도 했다.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면, 아무래도 마감에 쫓겨서 윤문을 세심하게 할 시간이 부족했을 것이다. 일반 도서 번역의 요율이 좋지 않은 편으로 알고 있는데 아무래도 번역사가 여러 프로젝트를 동시에 할 가능성이 있고, 그러다 보면 마감에 쫓기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문장의 완벽함을 지키기보다는 마감일에 맞춰 원고를 인쇄소에 넘겨서 출간 일정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할 수도 있을 것이다. 출판사도 이익 추구 집단이고 일정에 맞춰 제품이 나와야 사업 계획에 차질이 생기지 않을 것이고, 출판사가 돈을 벌어야 또 다음 책을 기획하여 번역을 하고 출간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타협이 필요한 상황이 발생했을 것이다.


역서 출판이 버킷리스트에 머물러있을 때, 내 머릿속의 나는 얼마든지 기회와 여건만 된다면 도서 번역을 잘하는 번역가였다. 그런데 막상 그 꿈을 꺼내어 현실로 만들어내려고 해 보니, 과거의 내가 무척이나 부끄러워졌다. 역시 해보지 않으면 모른다. 해보지 않았으면 잘했는지 못했는지 판단할 자격이 없다. 완벽함만 추구하다가는 끝이 나지 않는다. 어떻게든 끝이 나야 책이 나온다. 글은 볼 때마다 부족한 부분이 보인다. 매일매일 수정한다고 더 나아진다는 보장도 없다.


나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계속 수정할 부분만 찾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다면 이 프로젝트를 영영 끝내지 못할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 기준도 그저 '나의 느낌'이라는 모호한 형태이니 말이다. 완벽하지 않지만 적당한 수준에서 작업을 멈추고 원고를 인쇄소에 넘길 수 있는 용기와 판단력이 완벽함을 추구하려고 하는 고집보다 더 훌륭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무에서 유가 되는 것만이 의미가 있다. 아무리 혼자서 완벽을 추구한다고 노력한다고 해도 일단 책으로 나오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것이 내가 얻은 첫 번째 교훈이다.


불과 17페이지 밖에 되지 않는 첫 번째 챕터에서 한 달이나 고군분투 한 후, 나는 비로소 다음 챕터로 나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한달간 아주 좋은 교훈을 얻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해야 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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