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는데 있어서 고민 중 하나는 미국식 조크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였다. 관용적 표현이 결합된 형태가 번역하기 상당히 까다롭다. 게다가 테크/개발 쪽 너드향 조크는 더욱 뭐랄까... 갬성 초월 번역이 필요한 것 같기도 하다. 어떻게 하는 게 가장 좋을까?
1. 관용적 표현이라도 최대한 직역을 하고 역자 주석 달아서 무슨 조크인지 주절주절 설명해주기
2. 한국인이 썼다면 어떤식으로 유머러스하게 썼을지 상상해서 한국식 조크로 바꾸기
1번이 정석인 거 같다. 그냥 그렇게 하는게 골치도 덜 아프다. 하지만 작가의 유머가 노잼 진지모드가 된다.
2번은 조크의 재미를 적극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노력을 들여야하는데, 잘하면 작가의 유머러스한 면을 잘 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분명 외국인 작가인데 한국인처럼 유머를 던지는게 말이 되나? 이상한 위화감이 있을 것 같아서 나 같은 초짜 도서 번역가는 시도하기 쉽지 않다.
아무튼 있는 시간 없는 시간 끌어다 틈만 나면 열심히 한장 한장 번역을 하던 중 회사 동료들과 독서 모임을 가지게 되었다. 1시간밖에 안되는 소중한 점심 시간에 서브웨이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켄트 백의 <Tidy First?>를 읽고 대화하는 자리였다. 리팩토링 등에 대한 이야기, 일의 우선순위에 대한 생각 등등 각자가 느낀 생각을 편안하게 나눌 수 있어서 좋았다. 끝날 때즈음, 용기를 내어 질문했다.
- 나: '왜 우리는 사용자를 돕는 업무를 하지 않고, 코드 정리라는 토끼굴에 빠지는 걸까요?' 라는 문장을 보면 토끼굴에 주석이 달려있고, 주석에는 '영어 관용어 Going down the rabbit hole을 번역한 것인데 무언가에 깊이 빠져들거나 이상한 곳으로 가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쓰여 있어요. '토끼굴'이라는 표현을 아예 안 쓰고 주석도 달지 않고 바로 의역해서 '코드 정리 업무를 하게 되는 걸까요?'라고 번역할 수도 있었을텐데, 어떻게 번역하는게 더 좋다고 생각하시나요?
나는 솔직히 역서에 번역이 잘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원문에 충실했고, 또 독자들에게 주석을 통해 충실하게 설명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디자이너 분께서 단호하게 대답해주셨다.
- 디자이너: 의역해주는 게 더 좋아요. 주석까지 읽게 만드니까 피곤해요. 번역가가 게으르다고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작년 여름의 일이라 정확한 워딩은 기억기 나지 않지만 '게을렀다'는 단어는 분명이 기억난다.) 이럴거면 그냥 챗지피티 돌려서 읽으면 되는데 왜 번역가가 번역한 걸 읽겠어요.
이때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아... 충실한 번역이란 무엇인가? 누구에게 충실해야할 것인가?
이 디자이너의 의견은 그러니까 이렇다. 독자가 빠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가가 최대한 내용을 정확히 파악해서 한국인 독자에게 잘 떠먹여줘야 좋은 번역이라는 것이다. 구구절절 알고 싶지 않다는 거다. 이 논리에 따르면 본문에 '토끼굴'을 그대로 살리다보니 한국어 문장이 어색하다. 읽다가 멈칫 하게 되니 좋지 않은 번역인 거다. 알맹이는 그대로 유지하되 독자가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재구성하는게 낫다. 듣다보니 완전히 설득됐다.
내가 이 질문을 콕 집어서 한 이유는 사실 내가 번역하는 책에도 'Going down the rabbit hole'이라는 관용문구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하하. 독자의 의견을 미리 들어볼 수 있어서 좋았다.
나는 다음날 번역 원고에서 '토끼굴'을 삭제했다. 그리고 미국식 조크, 이를테면 문장 뒤에 (윽!)과 같은 괄호 속 유머러스한 코멘트들은 과감히 뺐다. 핵심을 전달하는 데에 있어서 걸림돌이 되는 것은 빼는 것이 맞다고 판단했다. 원문에 충실한 것보다 작가가 진짜 전달하려고 하는 메세지를 한국인 독자에게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려면 한국어 문장이 물흐르듯 읽혀야한다. 굳이 작가의 조크를 살리려고 독자에게 불편함을 안기지 말자. 어차피 그건 미국인 독자가 읽어야 조크로 읽힌다. 조크를 번역하다가 노잼 진지모드되면 핵심 메세지가 흐지브리 될 수도 있다. 원문을 있는 그대로 번역하는 것보다, 핵심 메세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어쩌면 원작자의 의도에 충실한 것일 수 있다. (당연히 너무 지나친 의역이나 재구성은 안된다.)
이렇게 노선을 정하니까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별 생각없이 참석하게 된 독서 모임이었는데 초짜 도서 번역가 입장에서 매우 좋은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는 자리여서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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