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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이 변하고 출판 계약서도 변했다

by Lyla

15년 전쯤, 그러니까 내가 병아리 에디터였던 시절, 영국 출판사로부터 저작권을 사서 어린이 영어 교재를 만드는 프로젝트에 투입되었다.


그땐 (라떼는 말이야....) A4용지에 범용 계약서를 출력해서 외부 변호 자문을 받고 여러 차례 상대 출판사와 이메일로 핑퐁을 한 끝에 최종본 2부 출력해서 한부씩 예쁘게 나란히 모은 다음 회사 도장을 가운데에 한 번씩 쾅쾅 매 페이지마다 찍어주고 팀장님 부장님 전무님 사장님 결재받아서 최종 날인받은 후 우편봉투에 넣고 해외 우편 발송을 했었다. 우편 발송 영수증과 송장도 잘 챙겨서 수기로 장부에 기입했었지... 그리고 3주 정도 지나면 계약서 1부가 다시 국제 우편으로 회사 사무실에 돌아왔다. 이렇게 상대 출판사 날인이 찍힌 계약서를 받으면 문서철 하는 것까지가 계약서 업무!


계약서에 오타가 있지는 않은지, 미처 다 살펴보지 못한 조항이 있는지는 않은지, 계약서가 제대로 영국에 도착했는지, 조마조마하면서도 설레는 기분이 있었다. 이 계약서가 비행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영국의 출판사 사무실로 날아간다는 것이, 그리고 또 그곳에서 나와 비슷한 일을 하지만 생김새도 언어도 문화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내가 보낸 계약서를 꺼내어 읽고 날인을 했을 거란 생각을 하면 뭔가 더 넓은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어 낭만적이기도 했다. 그쪽에서 보낸 우편 봉투를 열었을 때 괜히 영국의 공기가 같이 실려온 것 같아 반가웠다. 우리 사무실의 공기도 그쪽에 전달되었겠지.


그 뒤로도 홍콩, 싱가포르 등의 회사들과 계약서를 주고받은 적이 있는데, 포스트잇에 계약서 검토 작업을 빠르게 진행해 줘서 고맙다는 따뜻한 메시지가 계약서에 붙어있었던 적도 있었다. 크으... 이 맛에 또 이 일을 하지. 그땐 내가 계약서 2부를 받아 날인해서 1부를 돌려보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역시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옛말이 틀린 말이 아니다. 어찌 편지를 받았는데 그냥 지나칠 수 있으랴. 나도 끄적끄적 메모지에 장을 써서 날인을 마친 계약서 1부와 함께 우편을 보냈다. 별 것 아니지만 왠지 일이 더 잘 풀릴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참 기분이 좋았던 기억이 난다.


그 뒤로 강산이 한번 변하더니 계약서 업무에 혁신이 도래했다. 젠 챗지피티에게 내 상황을 간단히 설명해 주고 해외 도서 출판 계약서를 영어로 만들어달라고 했다. 1분도 되지 않아서 깔끔한 계약서가 완성되었다. 구글독스 문서에 옮겨서 몇 군데 손을 보고 바로 작가에게 파일을 공유해 줬다. 작가도 계약서를 보고 좋다고 메시지를 보내주었다. 그리고 전자서명 서비스업체를 몇 군데 찾아봤다.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기간을 제공하는 곳이 있길래 가입해서 문서를 업로드했다. 전자서명 가능한 계약서가 1분도 안되어 뚝딱 완성되었다. 내 이름으로 전자 서명을 하고 계약서를 작가에게 전송했다. 그녀도 전자 서명을 하면 계약 업무는 끝이다. 이 모든 게 불과 1시간도 안 걸렸다. 과거와 비교하면 가히 놀라자빠질만한 혁신이다.


전자서명 서비스를 알아보다가 AI로 계약서 검토 및 자문을 해주는 서비스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제 리걸 AI도 상용화 가능 수준에서 실제로 광고까지 하는 정도로 발전한 것이다.


병아리 에디터 시절, 어쩐지 졸음이 쏟아지는 오후 3시쯤 계약서가 든 우편봉투를 조심스레 들고 해외우편 접수하러 잠시 우체국에 다녀오는 외출 시간이 어찌나 달콤하던지. 15년이 지난 오늘, 나는 회사 업무를 위한 계약서가 아닌, 내가 세상에 내고 싶은 책을 위해 출판 계약서를 작가에게 보냈다. 세상이 변하고 나도 많이 변했구나.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대가 없이 하는 것은 참 달콤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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