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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디자인을 맡기고 시작된 슬럼프

by Lyla

혼자서 역서 출판을 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내가 그저 하고 싶은 일은 우아하게 카페에 앉아서 글을 읽고 번역하는 일이었지만, 책 한 권을 세상에 내려면 그 외에 할 일이 이것저것 많다.


영어식으로 말하자면 나는 '모자를 여러 개 쓰고 있는 셈'이다. 원문 콘텐츠를 어떤 스타일로 어떻게 구성해서 낼지 고민하는 기획자, 원문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번역가, 번역한 텍스트를 읽기 좋게 여러 번 읽고 다듬는 편집 총괄, 한국 독자들의 취향에 맞게 디자인을 고민하는 디자인 총괄, POD와 전자책 등록 및 인세 등을 신경 쓰는 유통 담당, 어떻게 책을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알릴지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마케터. 이 모든 역할을 커피 한잔 마시면서 우아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매우 오산이었다. 원래 다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영역별로 전문가가 있는 것 아니겠는가.


예전에 주니어 에디터로 회사에서 일할 때는 내 의견을 마음대로 펼칠 수 없어서 아쉬움과 답답함이 없지 않았다. 내가 생각했을 때 '좋은' 디자인이나 '좋은' 표현, 더 효과적인 마케팅 방식 등등이 있어도 결국 까마득히 높은 선배님들과 사장님의 안목대로 일이 진행되었던 것이 좀 불만이었던 것이다. 그러다 이번에 드디어 내가 내 마음대로 뜻을 펼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설렌 것도 잠깐. 작업하는 내내, 내 안목과 아이디어가 진짜 좋은 건지 어떤지 감이 도저히 안 와서 답답하고 불안한 것이 디폴트였다. 역시 일 조금 해본 주니어 3년 차가 제일 겁도 없고 제일 어리석다. 하하.


불안은 디자인 작업에 시동을 걸면서 시작되었다. 원서의 심플한 스타일을 유지하면서도 한국 도서 트렌드에 크게 벗어나지 않도록 하고 싶었다. 약간의 변주를 더해서 책의 내용을 더 돋보이게 하고 싶었다. 여러 도서를 보면서 참고할만한 디자인을 찾아두었다. 그리고 포트폴리오가 마음에 드는 프리랜서 도서 디자이너를 찾아 작업을 의뢰했고 이런저런 희망사항을 전달했다.


그리고 며칠 뒤에 시안이 도착했다. 고민이 됐다. 이 정도면 괜찮은 걸까? 디자이너의 감각을 더 믿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시안을 더 발전시킬 수 있을까? 이건 좀 촌스럽지 않나? 아님 내가 처음 해봐서 잘 모르는 건가? 내딛는 걸음 하나하나가 불안하다. 자금을 넉넉하게 써서 일류 디자인 에이전시에 작업을 맡기는 것도 아니라서 디자인 피드백을 전달할 때마다 신중을 기하다 보니 더 어려웠다.


나는 디자인 백그라운드가 없다. 그래서 괜히 더 걱정이 되었다. 내가 가진 거라곤 수백 권의 책을 종류를 가리지 않고 읽어본 독자로서의 경험밖에 없다. 그저 나의 느낌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점점 디자인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불안해졌다. 초벌 번역을 마치고 윤문을 하는데, 읽을 때마다 모든 문장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맞춤법도 무지 많이 교정해야 했다. 하면 할수록 글이 나아지고 있다는 확신이 드는 게 아니라 더 혼란스러웠다. 점점 역서 작업이 재미있는 사이드프로젝트가 아니라 제출일이 다가오고 있는 커다란 과제처럼 느껴졌다. 회사에서 일할 때도, 아이랑 놀 때도, 주말 아침에 빈둥거릴 때도 괜히 마음이 불편했다. 아무도 하라고 하지 않았는데 왜 나는 쓸데없이 사서 맘고생인가? 노트북을 붙잡고 원고를 쳐다본다고 뭐가 나아지는 것도 아니었다. 이것이 바로 스불재? ('스스로 불러온 재앙'의 줄임말이라고 배웠는데 아 이럴 때 쓰는 거구나 싶어서 내적 기쁨이 차올랐다.)


그러던 중 원고에 있는 한 구절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더 멀리 가려면 강력한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무언가를 해야 할 강력한 이유가 있으면 아침에 눈이 번쩍 떠집니다. 왜 그럴까요? 어떤 일을 해야 할 이유가 명확하지 않다면 결국 흐지부지 되기 때문입니다.


참 맞는 말이다. 내가 이 일을 왜 하는지 다시 생각해봐야 할 타이밍이었다. 나는 왜 이 책을 내고 싶은가 생각했다. 처음에는 그냥 도서 번역을 해보고 싶었다. 남는 시간에 작은 사이트프로젝트를 소소하게 해보고 싶었다. 내 번역 경력에 도서 번역이라는 이력 한 줄을 추가하고 싶었다.


그런데 책을 번역하면서 내용을 여러 차례 읽고 곱씹어 보니 내가 진짜 이 책을 내고 싶은 이유는 이 책을 통해 받은 위로와 응원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나눠주고 싶어서다. 나처럼 어떤 일을 할 때, 이를 테면 새로운 회사로 이직해서 적응해야 한다든지, 처음으로 어떤 프로젝트를 해본다든지 할 때, 혼란스럽고 지친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다시 힘을 내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게 하고 싶다. 정보 구조 설계에 대한 책이지만, 그 어떤 책보다도 나에게 큰 위로를 주었다. (나도, 작가도 대문자 T이기 때문일까?) 내가 이 책을 세상에 내야 하는 강력한 이유를 스스로 찾으니 답답한 마음이 가시기 시작했다. 사실 책을 내서 디자인이나 글에 대한 악평을 듣는 것보다 이 모든 것이 흐지부지 되는 게 더 악몽 같았다. 그렇게 나는 슬럼프를 극복했다.


슬럼프 극복에 도움을 준 책이 하나 더 있다. 김연수 작가의 <소설가의 일>인데, 김연수 작가가 첫 번째 소설 출간 이후 받은 첫 번째 평론의 제목은 “작가 김연수에 대한 단명의 예감”이었다고 한다. (너무하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무플보다 악플이 나은 것이다.) 책을 출간하는 사람은 마음먹고 팬티를 내린 채 대중 앞에 나서는 것과 같다고 말한 어떤 시인의 말을 인용한 부분을 읽고 나는 도리어 자신감이 생겼다.


나는 대단한 글을 쓰는 것도 아니고 작은 역서를 만들고 있을 뿐인데. 뭐 그렇게까지 긴장하면서 남들이 디자인이나 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걱정하면서 애쓸 거 있나? 중요한 건 내가 이 일을 하는 이유에 충실하는 것. 흐지부지되지 않도록 끝까지 집중하는 것. 그리고 좋은 반응이 있으면 기분 좋고. 아님 말고. 이 모든 과정이 워킹맘으로서 하나의 작은 일탈이자 모험이었기에 그것만으로 벌써 만족스럽다.


하하 이제 내지 디자인도 어느 정도 마무리 됐고, 도대체 그래서 어떤 책을 준비하고 있는지 주변에 공개할 때가 된 것 같다.





https://brunch.co.kr/@lylawrites/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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