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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이 없는 사주. 나만의 개운법이랄까

by Lyla

요즘 사주 관련 콘텐츠를 보는 것에 맛 들렸다. 나는 사주에 금이 부족하다. 금이 부족한 사주는 결단력이 부족하거나 일을 벌여 놓고 정리하거나 매듭짓는 능력이 약하다고 한다. 약간 뜨끔했다. 과거의 내 모습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태교 한답시고 바늘코 인형 만들기 시작했다가 중간에 포기한 일, 개인 브랜딩용 소셜 계정을 만들었다가 게시물 몇 개 겨우 올리고 폐쇄한 일, 육아 일기 쓰겠다고 태블릿으로 한컷 만화 그리다가 멈춘 일, 회사에서 작은 프로젝트를 만들어서 패기롭게 진행하다가 퇴사하면서 끝을 보지 못했던 기억.


시작은 장대하나 끝이 미약한 스타일. 반짝이는 눈빛으로 여러 사람을 설득해서 일을 벌리지만 뒷심이 부족하여 결과물이 부실한 스타일. 타인에게 이런 평가를 실제로 받은 적은 없지만, 냉정하게 나를 돌아보면 나는 이런 사람인 것 같다. 사실 지금까진 그냥 그래도 괜찮았다. 자잘한 취미생활이야 흥미가 없으면 언제든 그만 둬도 그만이고, 어차피 흐지브지 된다고 큰일이 날 프로젝트는 애초에 시작도 하지 않았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나의 용두사미 같은 성향이 문제가 된 적은 한번도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언젠가 조직을 떠나 홀로 서기를 해야할 운명이라는 걸 떠올려보면, 나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언제부턴가 나는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나는 혼자서 어떤 결과물을 낼 수 있을까? 다방면으로 여러 도움을 줄 수 있는 동료들, 조직이 내는 성과, 조직의 이미지나 유명세 등에 가려진 나의 진짜 능력은 무엇일까?


내가 세상에 제안할 수 있는 가치는 무엇인가? 직장 근무 13년차. 이젠 무슨 일을 하든 이 질문에 답을 찾으며 일을 해야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 우당탕탕 그냥 시작해본 역서 출판 프로젝트는 그냥 한번 또 벌려보는 일에 그쳐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사실 이것도 중간에 그만둘려면 그만 둘 수 있는 핑계는 무수히 많았다.


몇 달 전에는 폐렴에 걸려서 몸이 오랫동안 아팠다. 게다가 직장에서 바빠지면서 일하고 집에 오면 살림하고 육아하느라 너무 피곤했다. 그리고 가족 스케줄이 많아져서 작업할 시간을 내기 어려웠다. 어차피 이거 한다고 뭐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누가 알아봐주는 것도 아닌데 굳이 힘들게 노트북 들여다볼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종종 들었다.


어떨 땐 나의 부족함에 놀라 그만두고 싶었다. 내가 쓴 문장을 읽고 지우고 다시 쓰는 과정에서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았다. 도저히 풀 수 없는 퍼즐같이 느껴지는 문장들도 있었다. 나의 한없이 부족한 모국어 실력이 너무 부끄러워서 조용히 그만둬야할 것 같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교정지를 받아보는데 숨이 턱턱 막혔다.


어차피 반드시 지켜야할 마감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디서 계약금을 받은 것도 아니고. 이 책을 기다리는 독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없던 일처럼 해도 되는 거 아니야?




하지만 이번에는 달라야했다. 그 어떤 때보다도 은밀하게 조용히 작업하던 프로젝트였는데, 뭔가 진척이 없다고 느껴질 때 주변에 일부러 선언을 하고 다녔다. 가족들에게도 알리고 몇몇 친구들에게도 알렸다. 아이티백이라는 팟캐스트 콘텐츠 녹음에 나가는 김에 거기에서도 책 이야기를 했다. 사실 아무도 내가 이 프로젝트를 끝까지 완수하는지 안하는지는 관심 없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놀랍게도 타인에게 관심이 없다. 하지만 주변에 알렸기 때문에 이 프로젝트는 내가 바늘코 인형만들기 세트를 버리듯 없던 일로 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금이 없는 사주를 타고난 만큼 이번 역서 출판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개운을 해보자는 마음으로 매일 조금씩 무언가를 했다.


점점 결승선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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