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은 T들을 위한 지침서
당신은 일을 할 때 어떻게 시작하는가? J형인 나는 계획을 짠다. 대체로 조직에서 일을 시작할 때는 누구나 기획부터 시작한다. 마케팅이든 사업 개발이든 HR이든 디자인이든 분야 가릴 것 없이 무슨 일을 어떻게 할 것인지 기획안부터 만든다.
나는 이런저런 다양한 일을 해봤지만 사회 초년생 때 주니어 PM으로 일할 때는 기획안을 짤 때가 제일 좋았다. 모든 게 아다리가 딱딱 맞는 판타지 월드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필요한 자원과 태스크들을 작은 레고 블록 삼아 나의 판타지 월드의 조립 안내서를 만든다. 나의 판타지 월드가 판타스틱할 수 있는 이유는 이 블록들을 내 마음대로 찍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블록이 착착 잘 끼워지면 기분이 안 좋을 수가 없다. 필요한 블록 색상도 모양도 사이즈도 완벽. 이대로만 하면 드림 하우스를 만들 수 있다. 나의 기획력에 내가 감탄한다.
안타깝게도 J형이 기분 좋은 건 여기까지. 기획한 대로 하나씩 실행에 옮기기 시작하면 온통 머리가 지끈지끈 아플 일밖에 없다.
여러 명이 모이면 어디든 시끌시끌할 수밖에 없다. 각자의 머릿속에 있는 멘털모델을 기반으로 기획서를 해석한다.
아 이게 그 뜻이었어요? 아 이 일정이 그 중간 공유 일정이었어요? 그거 안될 거 같은데요. 우리 원래 디자인을 이런 느낌으로 하기로 한 건가? 이거 좀 어감이 좀 이상하지 않아요? 내가 보기엔 괜찮은데 왜 저래? 누가 예산을 이렇게 말도 안 되게 쓴 거야!
여기저기서 아우성이 들린다. 현실에서 조립할 블록들은 어딘가 모르게 조금씩 서로 어긋나 있다. 분명 함께 으쌰으쌰 하기로 했는데 열심히 하면 할수록 점점 배가 산으로 가는 느낌이 들면서 이미 늦었다. 아무리 블록끼리 붙여봐도 착착 붙지가 않는다. 여기저기 헐거워서 조금만 손끝만 잘못 스쳐도 우르르 무너진다. 누구나 이렇게 처참하게 무너져버린 조별 과제를 대학 다니면서 해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엿한 사회인이 되고 취직을 한 후에도 맡는 프로젝트들이 다 이럴 줄은 몰라 당황하는 시기가 반드시 온다. 나는 아직도 기억이 난다. 내가 열심히 만든 판타스틱한 기획서와 너무나 동떨어진 현실에 좌절하여 맥아리 없이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가던 길. 몇 달을 야근하면서 프로젝트를 위해 달렸지만 내가 만든 조립 안내서와 비슷하면서도 여기저기 턱없이 부실해 보이는 결과물을 내고 마음이 심란했다.
모두가 열심히 한 것 같은데 왜 일이 안될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사실 여기 사람들이 나랑 잘 안 맞는 걸까? 내가 이 일이랑 잘 안 맞나? 이 회사가 나랑 궁합이 안 맞나? 저번 회의가 이상하게 꼬여버려서 그런가? 그냥 재수가 없었던 걸까? 저 이상한 팀장만 아니었다면 잘 됐을까? 당시 사회생활 쪼렙이었던 나는 원인을 외부에서 찾으려고 했다. 나의 판타지 월드가 산산이 무너져버리는 경험은 정신적 스트레스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영향이 있었는지 실제로 가슴이 아팠다. 나는 어깨너머 일을 배울 수 있는 사수도 없었고, 그저 너만 믿는다며 응원(?)해주시는 임원분들밖에 없었다. 나는 당시에 비록 사회 초년생이지만 일을 잘하니까 회사에서 신뢰도 얻고 꽤 큰 프로젝트의 PM을 맡아서 일할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에 더욱더 잘해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나 보다.
지금 돌이켜보면 불필요한 자의식 과잉에 사회생활이란 무엇인지, 일이란 어떻게 되게 하는 것인지 전혀 몰랐던 어린 친구였다.
지금 작업하고 있는 책은 바로 13년 전의 나에게 건네주고 싶은 책이다. 일을 잘하고 싶어서 기획을 열심히 하는 친구. 하지만 기획대로 되지 않으면 울화통이 터지는 친구. 그렇다고 이해관계자들을 잘 설득할 도리를 알지 못해서 허둥대는 친구. 고작 몇 번의 좌절 가지고 나는 어쩌면 조직에서 사람들이랑 부대끼며 일하는 게 맞지 않을지도 모른다며 프리랜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친구. (나이브하게도 프리랜서도 필연적으로 같은 종류의 혼돈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이땐 몰랐다.)
13년을 더 일해보니 알겠다. 일을 하면 반드시 혼돈 속에 빠진다. 필연적이다. 사람과 정보가 섞이기 시작하면 언제나 일은 혼돈의 카오스로 향한다. 엔트로피의 법칙인가. 아무튼 이 세상의 모든 일은 대체로 무질서한 상태로 나아가는 것들을 인간이 보기에 질서 있게 정렬하고 정리함으로써 가치를 창출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그렇게 보면 일을 하는 원리는 대체로 비슷하다. 그 원리를 이해하는 자가 일을 되게 하는 자다. 그 원리를 이해하면 일하면서 부딪히는 크고 작은 혼돈에도 크게 좌절하지 않는다. 판타스틱한 결과물을 만들면 좋겠지만 거기에는 운이 따라야 한다. 그렇게까지는 못하더라도 중도 포기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최악의 결과는 면할 수 있다. 그리고 조금씩 깨닫는다. 일이 제대로 되게 하는 것은 T의 기가 막힌 기획력이 아니라 결국 함께 일하는 사람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그들을 이해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조판이 끝나고 이제 2교 교정을 보고 있다. 전문 편집자가 왜 있는지 알겠다. 좋은 번역가는 우리말을 잘 쓰는 번역가라는 것을 다시 뼈저리게 느끼면서 아직 더 많이 읽고 쓰고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겸손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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