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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토끼 Oct 23. 2022

백수가 되었습니다

아주 오래된 열세자리 계좌 번호

느지막하게 일어나 아침밥을 먹는다. 머리는 이삼일에 한 번 감고 세수는 열한 시가 다 되어서야 얼굴의 건조함을 못 참고 겨우 한다. 간단히 집안일을 마치고 나면 오전 내내 이리저리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거나 유튜브를 본다. 2500원 배송비를 아끼자고 더 필요한 게 없나 샅샅이 뒤져보는 시간 낭비용 인터넷 쇼핑도 한다. 완벽한 백수의 하루이자 요즘 나의 모습이다.


‘돈 한 푼 없이 빈둥거리며 놀고먹는 건달’


사전에 실린 백수의 정의이다. 건달이라는 말에 울컥 반발심이 들지만 건달을 다시 사전에서 검색해 보면 ‘하는 일 없이 빈둥빈둥 놀거나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이란다. 반박할 수 없다. 지금의 나는 백수건달이다.


생각해보니 처음은 아니다. 십 오년쯤 전에도 나는 이렇게 할 일없이 집에만 박혀 하루를 보냈다. 아직 돈을 벌 때는 아니었지만 대학생이라는 명함과 공부라는 직무를 한 해 반 동안 온전히 내려두었으니 백수라 할만 했다. 미래에 대한 창대한 계획을 펼치기 위한 숨고르기 같은 건 아니었다. 좀 아팠다. 장에 염증이 계속 생기는 난치병 때문이었는데 당시에는 꽤 심각했다. 다행히 어느 정도 건강이 회복되어 무사히 대학을 졸업하고 일을 시작했다.


그러다 올해 초 다시 쉬기로 결심한 건 아빠 곁에 있기 위해서였다. 휴직을 하고 고향에 내려온 후 나의 하루는 아빠에게 맞추어 돌아갔다. 아빠에게 아침 인사를 하며 하루를 시작하고, 잠자리에 든 아빠에게 호흡기를 씌워 드리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일과가 사라져 버렸다. 진짜 백수가 된 것이다.


난 무얼 해야 할까. 맘껏 자유롭게 쓸 수 있는 텅 빈 하루들이 아침마다 나를 기다리고 있다. 문제는 아무 것도 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나마 남아 있는 의욕을 모두 긁어모아 하는 일이 바로 이 글을 쓰는 것이다.


아빠는 이렇게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 어떻게 했을까? 십오 년 전 처음으로 백수가 되었을 때 아빠에게 조금은 비슷한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사는 게 원래 이렇게 재미가 없느냐고. 이렇게 재미가 없을 때는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그러자 아빠는 간결하게 답해주었다.


- 원래 사람은 재미로 사는 게 아니다.


그 때는 그 말의 무게를 다 알지 못했다. 돌도 씹어 먹을 나이의 딸이 돌은커녕 밥 한 술 제대로 못 소화시키고 집에만 박혀서 인생이 재미없느니 어쩌니 하는 걸 듣고 있는 아빠의 마음이 어땠을지도 미처 알지 못했다. 

아빠는 내가 아플 때도, 나아졌을 때도, 그러다 집을 떠나게 되었을 때도 똑같이 단정한 옷매무새로 출근길에 나서 성실히 일했다. 저녁이면 친구들과 어울려 술이라도 한 잔 하는 법도 없이 제때 퇴근해 엄마와 저녁을 먹었다. 아빠는 인생을 재미로 살지 않았다. 책임감으로 살았다.


그런 아빠의 흔적을 이제는 하나씩 지워야 한다. 얼마 전에는 아빠가 월급통장으로 쓰던 계좌를 없앴다. 36년 동안 사용했던 계좌 번호. 아빠의 이름 옆에 사망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가족관계증명서를 들고 은행 창구로 가서 그 오래된 계좌를 10분 만에 뚝딱 이 세상에서 없애버린 날, 엄마는 텅 빈 눈으로 대기의자에 앉아 있었다. 이 은행 계좌 하나에 너희 아빠의 평생이 담겨 있었는데 하시면서.


월급 통장 계좌에 연결되어 있던 카드의 마지막 할부금은 엄마의 환갑 선물이었다


실은 감사한 평생이기도 하다는 걸 알고 있다. 아빠가 긴 세월 동안 세상의 풍파에 아랑곳없이 한 곳에서 쭉 일해 주신 덕분에 우리 가족은 부유하지는 않아도 누구에게 손 벌릴 일 없이 맘 편히 살아왔다. 그런 안정감이 사람의 성정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나이를 먹을수록 새삼 실감한다.


그럼에도 마음 한편에는 어쩔 수 없이 남는 아쉬움이 있다. 아빠도 한 번쯤은 시간이 남아돌아 어쩔 줄 모르는 백수가 되어 봤더라면. 젊은 날 어떤 이유로든 잠시라도 일을 쉬어 보았거나 퇴직이라도 좀 서둘러 했더라면. 재미로 사는 건 아니라지만 단 일 년이라도 책임감에서 벗어나 그저 재미있는 것들이나 하고 사는 날들을 누려봤더라면.


하지만 두껍고 단단했던 아빠의 두 손은 백수(白手)가 될 새도 없이 너무 빨리 힘을 잃고 사라져 버렸다. 나는 아빠에게 한 번 더 묻고 싶다.


아빠, 그래도 조금은 재미있기도 한 인생이었어?

  

그 대답을 듣고 싶다. 꿈에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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