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증을 가시게 하는 살얼음 식혜

쓸모에 관하여

by 김규리

엄마는 밥을 매일 지으신다.

매일 그 밥을 다 먹게 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하루가 지난 밥은 맛이 없다며 밥이 되면 밥솥에 밥을 덜어 내 식힌 후 그 밥은 차곡차곡 냉장고에 들어가게 된다.

그렇게 들어간 밥은 가끔은 볶음밥으로, 가끔은 누룽지로 만들기도 하시는데, 조금 큰마음을 먹으실 때는 감주(단술) 즉 식혜를 만드신다.

자세한 조리법은 모르지만, 질금(엿기름)을 사 오셔서 바락바락 빨래 빨듯이 빨아 우러나온 뽀얀 물과 밥을 밥솥에 넣고 하룻밤이 지나도록 보온을 유지했던 걸로 기억된다.


감주를 만들 때면 아주 오래된, 보온과 취사 버튼만 있는 커다란 전기밥솥이 집에 등장하는데, 그 전기밥솥을 볼 때면 왜인지 모를 정겨움이 묻어난다.

유행과 기능에 밀려 뒷방으로 옮겨진, 엄지로 버튼을 누르며 뚜껑을 열 때면 온 김을 그대로 쐬게 만들던 전기밥솥이 등장만 해도 파블로프의 개처럼 엄마의 식혜가 공식처럼 떠오르는 이유도 있지만, 유년시절 방바닥 한편에 따뜻한 온기를 뿜어내며 식구들의 밥을 책임졌던 밥솥이 그저 자신의 쓰임이 달라졌을 뿐이라며 20여 년의 세월쯤은 아무것도 아닌 듯 자신의 건재함을 알리는 것 같달까.


해서 그 밥솥을 보면 쓰다만 작품들이 떠오른다.

시기를 재다가 되려 때를 놓쳐버린 작품.

역량이 부족해서 멈춰버린 원고들.

열심히 했지만, 기회를 잡지 못했던 것들.

저 밥솥처럼 내 작품도 다시 쓰임이 생기지 않을까 싶어서

언제고 생명을 틔울 수 있게 관심을 기울여 쓸모를 다할 수 있도록 작품들을 잘 보관해두고 싶어 진다.

결과를 얻지 못한 결과물들도 과정에 그치지 않도록 이따금 꺼내 반질반질 닦아두어야지.


엄마의 식혜는 너무 달아 목이 아플 지경이지만

살얼음 끼도록 얼린 뒤 마시는 시원한 식혜는 더위도 싹 날려버리곤 한다.

내 치워둔 작품도 어느 순간엔 누군가의 갈증을 확 가시게 하는 원고로 탄생될 수 있게 되면 좋겠다.

아직 더위가 가시지 않는 날 얼음을 동동 띄운 살얼음 낀 엄마의 식혜처럼 말이다.



Painter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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