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 서점원 Aug 31. 2022

창과 방패

2020

새벽에 두부가 소주잔을 깼다. 마시고 난 소주잔을 바로 치우지 않고 그대로 테이블에 올려 둔 내 잘못이다. 덕분에 난데없이 새벽에 청소를 하게 됐다. 이웃에 방해가 될까 청소기를 돌릴 수도 없어서 빗자루로 쓸어내고 물티슈로 닦아냈다. 그 와중에 또 깨진 유리에 손을 베었다. 익숙한 감각.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나도 한참이나 칼과 친하게 지내던 시절이 있었다. 양공장과 정육점에서 돈을 벌던 때다. 그때는 칼에 베이거나 찔렸을 때 느껴지는 싸하고 찌릿한 감각을 짧은 주기로 자주 경험했다. 아무리 조심을 한다고 해도 결국 하루 종일 손에 칼을 쥐고 있다 보면 어떻게든 분기별로 한 번씩은 베이거나 찔렸고, 그건 내게 일을 가르쳐주던 13년 경력의 사수도 마찬가지였다. 칼을 쥐고 있으면 칼에 상처를 받고, 돈을 쥐고 있으면 돈에 상처를 받고, 사람을 쥐고 있으면 반드시 사람에게 상처를 받기 마련. 오, 인생이여. 이런 잡생각을 하며 청소를 마치고 다시 자리에 누웠는데 잠들지는 못했다.


머리맡 두 가전기기의 싸움이 한창이다. 겨울에 접어들 무렵, 어쩐 일인지 한동안 기침이 멈추지 않았는데 원인은 코로나가 아닌 건조함 때문이었다. 그래서 장만한 가습기가 하나 있는데, 정말 신기하게도 가습기 하나 틀어 놓으니까 자기 전과 일어난 후 토할 듯이 몰아치던 기침이 싹 사라졌다. 쾌적한 환경! 이것이야 말로 문명의 혜택! 이래서 사람들이 돈을 버는 것인가? 따위의 감탄을 했고, 이렇게 된 이상 삶의 질을 더 올리자며 예전부터 눈 여겨 보던 공기청정기도 들여놓았다. 쾌적한 잠자리를 위해.


하지만 나는 몰랐지, 두 가전기기가 서로 앙숙일 줄이야. 가습기는 열심히 습도를 높였고, 공기청정기는 열심히 습도를 줄였다. 얌전히 작동하던 공기청정기가 가습기만 틀면 우웨에에엥! 하며 공습 싸이렌을 울리듯 모터를 돌리며 화를 낸다. 그러면 잔잔하게 퐁퐁퐁 하고 연기를 뿜던 가습기도 질 수 없다는 듯이 방역차 마냥 뿌아아앙! 하고 연기를 내뿜는다. 무엇이든 뚫는 창과 무엇이든 막아내는 방패의 싸움이 시작되는 거다. 상황이 이쯤되면 나는 몸을 일으켜 조용히 둘 다 야간모드로 바꿔 놓는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새벽에 깼고 다시 잠들지 못했기 때문에 이왕 이렇게 된 거 오늘은 아침 일찍 일어나 조깅도 하고 홈 트레이닝도 하고 아침밥도 챙겨 먹고 사람들의 출근 시간이 되면 못 돌린 청소기도 다시 돌리고 새나라의 어른이 마냥 부지런한 아침형 인간이 되어볼까 싶었는데, 거짓말처럼 해가 뜨니까 그대로 다시 잠들고 말았다. 해볼까 했던 모든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고, 평소처럼 알람이 울리자 ‘아, 피곤한데 그냥 오늘 하루 쉴까?’라는 생각을 하며 한참이나 더 이불을 뒤집어 덮었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교훈을 다시 한번 몸소 깨달으며 오늘 하루를 보통 사람들보다 느지막하게 시작한다.


이전 08화 로드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