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가족들이 첫 절을 올리기도 전, 이른 아침부터 조문객이 찾아왔고 그들을 맞이하느라 정신없이 오전을 보냈다. 조금은 뜸해진 오후 시간에 우리는 늦게나마 영정 앞에 절을 올렸다. 어머니를 보내는 일은 처음이었던 지라, 아침부터 허둥지둥 하셨던 아버지도 첫 절을 올릴 땐 ‘엄마.’하고 울었다. 자식들, 손주들이 모두 절을 마치자 작은 아버지는 슬쩍 분위기를 바꿔보고자, ‘우리는 이제 고아가 되었군!’이라며 농을 던졌고, 나는 그 말에 박준 시인의 문장이 떠올랐다. ‘우리는 모두 고아가 되고 있거나 이미 고아입니다.’
부고를 받은 건 크리스마스 이브 아침이다. 나에게는 이브와 크리스마스가 12월 매출의 반짝 상승을 기대해 볼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어서, 처음 연락을 받았을 때는 슬픔보다 아쉬운 마음이 더 컸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사실 오픈을 했어도 손님이 없었을 것 같다.) 코로나 시대의 장례식장은 이것저것 깐깐하기도 했고, 부르는 사람과 방문하는 사람 모두에게 부담이 될 수 있었기에 조촐히 가족만이 자리를 지켰다. (와중에도 어찌 알고 찾아오시는 분들이 계셨지만)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친지들과 오랜만에 만난 자리.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가족과 함께 보내라는 할머니의 큰 그림’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그간 나누지 못했던 안부를 물었다.
화장터에서, 우리 옆에는 부모가 자식을 먼저 보내는 다른 가족이 있었고, 자식이 부모를 보내는 건 어찌되었든 호상임을 알게 되었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울음 소리는 너무도 날카롭고 뾰족해서 생면부지의 타인에게까지 그 고통이 고스란히 전달됐다. 자식들에게는 반드시 건강하게 부모보다 오래 살아야 한다는 의무가 있는 것이다.
이제 남은 건 어른들의 일이었고, 아이들은 각자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다. 어차피 쉬었던 거 연휴를 꽉꽉 채워 오늘과 내일도 마저 쉴까 싶었지만, 왁자지껄하던 와중에 다시 집에 혼자 있으려니 외롭고 적적해서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나와 서점 문을 열었다.
‘혼자가 편하다지만, 결국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는 것이군.’이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게으름의 부채는 생각보다 이율이 높아서 반드시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되돌아온다.’라는 생각도 잠시 했다. 그러므로 ‘이제는 부지런하게 사랑을 해야겠군.’이라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하며 서점을 쓸고 닦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