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꽃)
며칠 전부터 이름에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하나 있었는데 타이밍이 맞지 않기도 했고, 워낙 뜬금없는 이야기라 미루고 미뤄왔다. 그러다 오늘 쓸거리가 딱히 떠오르지 않아서 한번 써본다. 때는 바야흐로 초등학생 시절로 돌아간다. 나는 초등학생 시절에 교실 구석 먼지 같은 존재라서 또렷하게 남아 있는 당시의 기억이 몇 없는데, 그 중 하나기도 하다.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고, 같은 반에 이름이 ‘최고야’라는 친구가 있었다. 지금도 흔하지 않은 이름이다. 성이 최씨고 이름이 고야다. 같은 반 친구들은 물론이고 선생님들에게도 굉장히 인기가 많았던 친구로 기억한다. 하루는 학급 반장과 회장을 뽑는 선거날이었다. (직책이 확실하진 않지만 아무튼 2명을 선출하는 선거였다.) 작은 쪽지에 반장과 회장으로 뽑을 두 후보의 이름을 적어서 제출하고, 투표가 끝나면 바로 개표해서 투표 용지에 적힌 두 후보의 이름을 호명, 칠판에 호명된 후보의 이름을 바른 정(正)자로 체크하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개표는 투표 용지에 적힌 반장 후보, 회장 후보 두 명의 이름을 호명하는 방식이 되었다. “이지은, 안유진.” 이렇게. 재미있게도 반장은 세 후보가 박빙이었지만, 회장은 고야가 독보적이었다. 그렇기에 개표 내내 “이지은, 최고야.” “안유진, 최고야.” “김제니, 최고야.” 식으로 호명되었고, 아이들은 이제 누가 선출이 되건 관심 없이 “○○○, 최고야!”를 떼창하는 것에 재미를 들였다. “○○○, 최고야!”, “○○○, 최고야!”. 개표가 모두 끝난 후에 이제껏 가만히 투표 광경을 지켜보시던 선생님이 한 마디를 하셨는데, 그게 바로 “고야는 앞에 있는 친구를 최고로 만들어 주는 멋진 이름을 가지고 있구나.”였다.
이 에피소드를 기억하고 있는 걸 보면, 분명 나에게도 어떤 의미가 되었던 게 아닐까 싶다. 다른 이름 뒤에 자신의 이름이 불려지면 앞에 있는 이름을 빛내 주는 이름. 그러므로 자신 역시 빛나는 이름. 혼자서는 흩어지지만 누군가의 등에 손을 올려 준다면 서로가 빛날 수 있는 이름말이다.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나는 그에게로 가서 과연 무엇이라도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