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공포를 기다리는 흰 종이’가 아니라 공포 그 자체인 흰 종이들이었다. 쓸게 많다는 핑계로 놀다 왔으니 나를 기다리는 건 백지다. 정신 차리고 어찌어찌 채우려 했더니, 원래 공부하려고 책상에 앉으면 괜히 책상 정리가 하고 싶어지는 게 순리니까. 그런 마음이라 쓰라는 글보다 쓸 필요 없는 잡설만 자꾸 맴돈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잡설부터 해치워버리자.
나는 기타를 칠 줄 알지만 멋진 기타리스트가 되고 싶은 건 아니야. 나는 커피를 내릴 줄 알지만 바리스타 챔피언이 되고 싶은 건 아니야. 나는 글을 쓰지만 대단한 작가가 되고 싶은 건 아니야. 나는 책을 읽지만 리뷰왕김리뷰가 되고 싶은 건 아니야. 나는 서점을 운영하지만 위대한 서점왕이 되고 싶은 건 아니야. (위대한 서점왕이란 무엇일까?)
대충하겠다. 할 줄 아는 것과 잘 하는 것. 나는 할 줄 아는 것에 만족한단 말이다. 잘하려면 힘들다. 0에서 80까지는 누구나 쉽게 쉽게 할 수 있는데, 80에서 90이 되려면 뼈를 깎는 고통이 있어야 하고, 90에서 98이 되려면 세월과 영혼을 갈아 넣어야 하고, 98에서 100이 되는 건 천운이 따라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무엇이든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될 수도 없다. 적당히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고 싶다. 최고가 될 생각이 전혀 없단 말이다.
나는 자영업자. 판매왕이 될 생각이 없는 자영업자. 놀기 좋아하는, 아 정정한다. 사실 노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걸 좋아한다. 돌이 되고 싶은 자영업자. 일하기 싫어 죽겠는데 또 물욕은 많아서 돈을 좋아하는 자영업자. 이렇게 잡설을 올리며 #글스타그램 해쉬태그 걸기를 좋아하는 관심이 필요한 어른이. 사람을 싫어하지만 외로운 건 더 싫어하는 답 없는 배타주의자. 나는 곤고한 사람. 내 인생을 망쳐도 좋으니 누구라도 나를 구원해 주길 바라는 어린 양. (*아가씨)